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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오렌지 Sep 28. 2020

그거나 그거나 2

https://brunch.co.kr/@anjji624/18


대기실에는 000강의실에서 만났던 일본 남학생이 앉아있었다. 강의실에서 만난 이후 오늘의 녹화를 위해 한두 번 만나 없는 정보력으로 중국어 연습을 하기도 했다.

제작진이 들어와 바쁘게 건네주는 방송국 대본을 넘기고 첫 페이지를 보는 순간 머리가 쭈뼛선다.


 :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안지영이라고 합니다. (꾸우뻑)

여자MC : 반갑습니다. 00씨(남자MC), 지금 안지영씨가 인사하는 모습으로 한국에서 했던 직업이 뭘지 상상해 보시겠어요?

남자MC :  글쎄요. 손 모아 인사를 정중히 하시는 걸 보니 서비스 직종이 아니었을까요?

여자MC :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이 분은 한국에서 스튜어디스였어요.

---------띠로링----------


학교로 제작진이 왔던 날, 그들은 안 나가겠던 나에게 간단히 지금의 학교와 공부하는 내용을 설명하고 재밌게 하루 놀면서 녹화하면 된다고 했다. 출연료도 생각보다 너무 높았고 야외 촬영 후에는 상해에서 유명한 딤섬집에서 식사가 있다고 했다. 아마 그 맛을 보면 평생 잊지 못할 거라며 나에게 장담했다. 그 말에 다른 걱정 안 하고 출연을 결정했었다.

그런데 대본 처음부터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진실처럼 이야기되어 버린다니......

유명 스타였으면 대국민 사기였을 것이다.


머리가 쭈뼛 서더라도, 후회가 물밀듯 밀려와도, 잠깐의 침묵으로 소문을 인정한 꼴이 된 지금, 진실을 다잡을 타이밍을 놓쳤다.

제작진은 나에게 긴장하지 말라며 혹시라도 중국어 하나라도 놓칠까 느린 속도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친절이나 중국 방송국에 놀러 오게 된 기쁨은 나에게 하나도 전달되지 않았다.


점심도 못 먹고 그렇게 들어간 녹화는 내내 나의 마음을 불편케 했다.

두세 가지의 게임이 끝나고 준비해 간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왔다. 리허설 때 나의 노래를 듣고 갑자기 연출자는 남자 MC를 부른다. 듀엣을 하라고 갑자기 가사를 나누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웠지만 그분은 화음까지 넣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가수 겸 MC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걸렸던 녹화는 끝이 났고 이틀 후 한국의 민속촌 같은 곳에서 그 일본 남학생과 짝이 되어 신랑, 신부로 중국 전통혼례를 치렀다. 또 다른 한 팀인 프랑스 신랑과 아프리카 신부와 한두 가지 대결을 하고 두 번째 녹화도 끝이 났다.


그 녹화분은 곧 방송을 탔고 학교에서의 나의 소문은 몰랐던 많은 다른 학생들에게도 진실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일주일에 3개의 채널에서 재방송이 너무 많이 나와 식당에서도 알아볼 정도였다.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 하는 첫 한마디,

" 아.... 한국 스튜어디스!"

어느덧 나의 마음속에는 ' ...그거나 그거나..'

그들은 반갑다며 만두 서비스도 주시고 이것저것 말을 붙이는 통에 상해 사투리 몇 단어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 화장할 시간이 없다 싶으면 지각을 할지언정 맨 얼굴로는 학교에 안 갔다.


3개월쯤 흐르고 11월 말에 기숙사로 전화 한통이 왔다.

상해 오락의 조연출이었다. 연말에 일 년간 출연했던 출연자 중에 화제가 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초대해 왕중왕전처럼 프로그램을 만든다 했다. 매년 그렇게 한다면서.


나는 서울에 있는 엄마에게 다시금 TV 출연을 하게 됐다고 옷 좀 보내달라고 했다.

엄마는 딸의 TV 출연을 못 보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며 상해로 날아올 기세였다.

실제로 본다면 어설픈 중국어 실수 연발에 스튜어디스로 탈바꿈 해 있는 딸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며칠 후 택배가 도착했고 그 안에는 하~아~늘색 퍼프소매의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거기에 맞는 7cm의 구두와.

브랜드를 보니 예복으로 많이들 입는 그런 드레시한 옷이었다.

눈동자가 파란 루마니아의 룸메이트에게 물었다.

" 이 옷이 그 프로그램이랑 맞을까?"

" 와~예쁘네. 모 어때? 입어봐. 내 눈동자랑 색깔이 똑같아 "

지금 어울리냐 물었거늘, 너의 눈동자 색과 원피스 색이 같은 게 무슨 상관이니? 묻고 싶었다.


녹화날 생각보다 많은 인원의 출연진에 조금 놀랐다. 그다음은 나의 원피스가 그들과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어서 당황했다. 적어도 구두 신고 온 사람은 없었기에.

녹화는 시작됐고 게임을 하는데 두 팀으로 나누어졌다.

1미터의 긴 젓가락으로 콩을 옮기는 게임이었다.

아뿔싸... 이 드레시한 원피스를 입고 우스꽝스러운 젓가락질을 해야 한다니.

게다가 한껏 올라간 퍼프소매는 내 팔뚝에 너무 꽉 끼었다.

긴 젓가락질 하기에는 원피스 한쪽이 들리는 형국이었다.


두 번째 게임은 상해 사투리를 전달해서 마지막 상해 사람이 맞추는 게임이었다.

칸막이 사이사이로 한 명씩 들어가 있고 내 차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부분은 서 있는 시간이었는데 7cm의 구두는 내 부은 발을 압박했다. 너무 피곤했고 그렇다고 재밌게 즐기지도 못했다. 내 노래는 유럽 어느 나라의 가수가 아니었을까 싶은 금발의 여성에게 무참히 묻혔다.

지금도 연말에 TV 속 나를 기억하면 하늘색 원피스 한쪽이 긴 젓가락질로 한껏 올라간 우스꽝 스러운 한 컷으로 선명하다.



오늘은 이 한 장의 사진 덕에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유학시절의 한 순간으로 들어갔다.

내 입으로 내뱉은 거짓말은 아니었어도 순간의 침묵 때문이든, 중국어 이해 부족이든, 잘못된 소문을 다시금 진실로 다잡지 않은 나의 결정으로 추억이 가지가지 가득하다. 요즘 같았으면 인터넷 정보 발달로 거짓말쟁이가 되었거나 방송사가 사과 자막을 내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 일 이후에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왔지만 나의 이 잘못된 사실이 들통날까 그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


지나간 일에 후회는 없지만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거짓말도 안 하려 노력한다. 잘못 이해할까 설명을 길게 이야기하는 TMI의 중년이다. 그때의 교훈이었을 것이다.


나를 유난히도 예뻐하셨던 전 선생님은 아직 살아계실까? 열 살이나 어리고 학교에서 내가 큰 소리로 "내 신랑" 하면 귀까지 빨개진 그 가짜 일본 신랑은 아빠가 되어있겠지, 나와 같이 듀엣으로 불렀던 그 MC도 여전히 활동 중일까?

무수한 궁금증이 갑자기 몽글몽글 일어난다.

이 사진 한 장이 가지고 있는 효과. 그건 잠시 그때의 청춘으로 돌아가게 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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