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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전거타는브랜더 Sep 20. 2020

어제보다 오늘 더 가까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이다.
 - 플라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 니체


<오리, 죽음, 튤립 - 울프 에를부르흐>


 나는 나에게 소중했던 사람들,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 내가 가본 모든 곳들, 내가 경험한 모든 순간들, 그리고 내가 쌓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지식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서글퍼집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달콤한 음식이나 영양분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 순간, 그 순간의 공기와 향기와 촉감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고 남겨둔 모든 것들을 다시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실'에 대해 언제나 방어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고 나의 모든 것을 상실하는 죽음은 더욱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일생을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갑니다. 마지막 숨이라는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공포는 궁극적으로 나의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소멸시킨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즉, 현재 아직 마주하지 못한 나의 진짜 행복을 '죽음'으로 인해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죽음은 언제나 우리가 존재하는 순간부터 함께하는 존재였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환경과 삶의 조건은 다르겠지만 언젠가 맞이해야 할 죽음에 대해 외면하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




죽음의 철학자들


오늘은 조금 '죽음'이라는 조금 무거운 주제로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평소에 잘 사용하지도 않을뿐더러 생각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 철학에서는 '죽음'에 대한 탐구는 고대 로마에서부터 계속되어왔고, 그 결과 죽음에 대한 연구가 매우 심층적이며 광범위하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꿈꾸지 않는 잠'과 같다고 말했으며, 법정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가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고,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시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인 키케로 또한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오로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으며, 시간이 한참 흘러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셸 드 몽테뉴도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죽음의 도제가 되는 행위인 동시에 죽음을 닮아가는 행위의 일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 연구를 했고,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이성은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으로 귀결됩니다.

정말 어리석고 건방지게도 나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가르침, 즉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철학을 충분히 받아들인 지식인이라는 오만에 빠졌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만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순간이 금세 다가왔습니다. 크게 다치거나, 주변의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이별' 소식을 접하면서 아직도 배울게 많고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필요하다는 배움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나의 죽음'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Self Portrait with Death - Arnold Böcklin>



삶과 죽음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병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죽음이 마치 갑작스럽게 나에게 다가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숨어 우리와 함께하지 않지만,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삶과 죽음은 '하나의' 계주 주자입니다. '삶'이 출발 신호와 함께 전력질주로 에너지가 다할 때까지 뛰었다면 그 바통을 '죽음'에게 전달하고 죽음이 레이스를 완주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진실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은 곧 '좋은' 죽음을 맞이하고 대비하는 일이며, 바람직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나의 다짐과도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삶'만큼 '죽음'도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거나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죽음'에도 주관적인 부분이 존재합니다. 바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입니다. 죽음을 공포로 느낄 수도 있고, 마치 니체와 소크라테스처럼 환희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단순히 오래 산다고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삶을 지속하는 시간의 길이가 아닌 시간의 질, 즉 주어진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간혹 저는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내가 죽는다면 죽음 때문에 놓치게 될 것들 중에서 가장 아쉬워할 일은 무엇일까?, 아직 살아있는 시간 동안 더 많이 하고 더 적게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부끄럼이 없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하면서 죽음을 좀 더 반갑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매사에 삶의 유한함과 죽음을 의식하면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누고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스스로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하는 것이 나의 일상에 어떠한 두려움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다고 할 때 '음침한 생각, 우울한 생각'이라고 꺼리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또는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말을 하면 불안감과 죽음이 더 빨리 다가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의 경험상 이런 생각이 더 불안감을 증폭시키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감을 줄여주고 반대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명확하게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뚜렷하게 해 주고 가장 의미 있는 관계에 집중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최근에도 물론 정말 우연처럼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을 알게 된 것도 있지만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목표를 조금 더 명확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건들이 아니라 사건들에 관한 그들의 판단이다. 죽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이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참으로 죽음에 관해 두려운 것이 있다면 죽음이 두렵다고 하는 인간의 생각일 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전 말이지만, 지금의 우리의 삶과도 너무나 닮아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사건에 대한 개인 의견으로 두려워하는가 하면, 남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건에 대해 혼자 과하게 신경을 쓰고 나중에 후회한다거나... 저는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그렇기 때문에 다가왔을 때 적절한 맞이를 하지 못한다는 것. 누구보다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바람으로 노력하고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짧은 인생을 허송세월 하게 보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아깝잖아요.

앞서 이야기했듯이 죽음은 우리의 삶과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결국 마주해야 할 죽음이라면 내가 살아온 소중한 삶과 시간 그리고 기억을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 '좋은 죽음'과 맞바꾸고 싶은 욕심이 생겨버렸습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은사



<소크라테스의 죽음>


우리에게는 두 번의 삶이 존재한다. 두 번째 삶은 우리에게 단 한 번의 삶만이 주어졌음을 깨닫는 순간 시작된다.


대학원 재학 시절 철학과도 아니었을뿐더러 '죽음'과 전혀 상관이 없던 학과의 학생이었던 저는 '죽음'과 관련된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의 생각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행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을 했고 결국 주제를 '죽음'으로 잡게 되었습니다(덕분에 졸업하기 어려웠지만...). 논문을 위해 이런저런 서적과 자료를 찾아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고 본격적으로 '나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이와 사고의 깊이로 봤을 때 전혀 대답할 수 없었지만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나는 나의 죽음의 순간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있지만 부끄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다짐한 이 프로젝트는 결국 시간이 흐르거나 내가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 끝이 나는 프로젝트입니다. 시간이 흘러 프로젝트의 끝인 나의 미래를 위해 벌이는 작업이며, 그 순간 함께할 순간의 사람들과의 약속이기도 한 프로젝트입니다. 스스로는 프로젝트의 완성도 있는 끝을 기약하며, 그 순간의 사람들에게는 내가 죽은 후 나를 잃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이 아닌 어차피 가게 될 길을 내가 두세 걸음 먼저 나아간 사람일 뿐이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자세는 어떤 자세인지 한번 뒤돌아 보는 시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들도 죽음을 단순히 두려움의 존재가 아닌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더 나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리, 죽음, 튤립 - 울프 에를부르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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