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음의태양 Apr 06. 2021

괜찮으시죠? 그런데 누가 코로나에 걸린 거예요

코로나 낙인과 정서적 거리두기

“괜찮으시죠?, 그런데 누가 코로나에 걸린 거예요?”


자가격리 중인 나에게 걸려온 전화 통화의 대부분은 이런 식이었다.

나를 염려하듯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누가 확진자인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접니다, 저요. 요즘 술만 먹고 자서 살이 확 쪘습니다. 확 찐 자요”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여러 번 반복되면서 나중에는 슬슬 짜증이 나기도 했다.


“여기 있으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자가격리 통보를 받게 된 까닭에, 집단시설 종사자인 아내도 출근 중지 및 재택근무 조치를 받았다. 내가 자가격리 통보를 저녁에 받았기에, 아내는 아침 일찍 사무실로 가서 재택근무를 위해 업무 자료를 챙겨 와야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일찍 출근하던 동료와 마주치게 되어 처음 들었던 말이 저 따위라는 게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가 격리자의 동거인이 바로 확진자처럼 취급받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그 동료는 아내가 서류를 챙겨간 다음에 상사와 협의하여, 아내의 책상 주위를 소독했다고 했다.

그 동료에 그 상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아내도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가 격리자 이든, 격리자의 동거인이든 상대방에 대한 우려와 공감이 먼저여야 되지 않을까.

아니면 좀 더 부드럽게, “괜찮으세요?”부터 대화가 시작됐다면,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발단은 물론 내가 2주 자가 격리자가 되면서부터였다.

옆 사무실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우리 사무실까지 모두 검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부서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 자가격리 통보를 받았다.

사무실의 역학조사 결과, 옆 사무실의 확진자와 우리 사무실의 확진자 간에는 큰 연관성이 없다는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난 상태이다. 물론 그 둘 또한 자각할만한 증상도 없었기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만큼 코로나는 이제 감염경로도 확실치 않고 생각보다 우리 주위에 많이 퍼져있고, 또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방역지침을 잘 지킨 사람들도 나도 모르게 확진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코로나 확진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치료를 받은 후에도 지속되는 ‘낙인찍기’라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일단 확진 판정을 받게 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확진자 자신의 문제 행동으로 감염된 것처럼 여겨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의 숨은 비난을 못 이겨 직장에서 퇴사를 하게 되는 사례도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사회동향 2020> 자료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코로나 낙인’에 대한 두려움은 코로나란 감염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공포를 넘어설 정도라고 한다. 국민 10명 중 7명이 확진 판정보다 걸렸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게 더 두렵다고 한다.


본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피하고, 안전을 지키려는 노력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본의 욕구를 넘어 다른 사람들을 낙인찍어, 주홍글씨를 새겨 넣는다면 이건 정말 도가 지나친 상태가 되고 만다.

우리가 거리두기를 하는 것은 나의 안전과 나와 연결된 사회의 안전을 지키려는 ‘물리적’ 거리 두기임은 자명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거리두기가 다른 사람을 소외하고 의심하는 ‘정서적’인 거리두기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사회정서적’ 코로나 바이러스에 이미 감염되어 버린 게 아닐까.


내가 다른 사람과, 특히 그다지 연관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도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요 며칠의 경험을 통해 잘 배워왔다. 그리고 나의 안위는 나와 가까이 있는 동료와 가족들에게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도 격리된 상황에서 알게 된다는 것은 또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기 있으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재택근무를 하기 위해 업무 자료를 가지러 잠깐 들었었던 사무실에서 아내가 동료에게 들었다는 저 말.

그 말의 끝에는 서슬 퍼런 칼이 달려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진다.

확진자도 아닌 자가 격리자의 동거인에게 까지도 가해지는 정서적 폭력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상황을 우리는 언제까지 남의 일이라는 말로 봐줄 수 있을까.

내가 자가 격리자가 될 때까지? 아니면 내가 확진자가 될 때까지 일까.

그 말의 끝에 내가 조용히 읊조려 본다

‘반사’

“말을 그러하게 하면서, 여기 있으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