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제목에 나오는 사전적인 의미는 낯선 지역에서 온 사람, 낯선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읽을 때마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보다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카뮈라면 뭔가 숨겨 든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주인공 뫼르소와 그가 연루된 사건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뫼르소는 순전히 태양 때문이라는 이유로 아랍인을 죽이게 됩니다. 그의 말은 철저히 배제된 채 살인 사건은 검사와 변호사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됩니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 무관심했다는 것, 엄마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것, 생전에 엄마를 양로원에 맡겼다는 것, 엄마의 장례식 이후 여자와 해수욕을 즐기고 즐거운 영화를 보고 사랑을 나눴다는 등등 그의 살인행위와 전혀 상관도 없었던 예전 일들이 그의 범죄행위의 동기가 돼버립니다. 검사는 이러한 동기를 들어 뫼르소를 사형시키기 위해 가설을 만들고 그 가설이 진짜인 마냥 배심원과 판사를 설득합니다. 범죄자라면 당연히 변호사의 말을 듣고 어떻게든 형량을 줄이기 위한 자세를 취해야 하지만 뫼르소는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거짓말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형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뫼르소는 한없이 나쁜 인간이며 살인자이고 불효자입니다.
P :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새로운 유형의 배덕자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여기서 정면으로 공격받고 있는 대상은 윤리가 아니라 재판의 세계입니다. 재판의 세계란 부르주아이기도 하고 나치이기도 하고 공산주의이기도 합니다. (중략) 만약 당신이 이 책을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거기서 어떤 정식성의 모럴을,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기쁨에 대한 해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찬양을 발견할 것입니다.
카뮈는 <이방인에 대한 편지>라는 제목으로 독일 독자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카뮈는 뫼르소를 윤리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윤리는 이 책의 초점이 아니고 공격의 대상이 재판이라고 말합니다. 재판에서 검사와 판사와 변호사는 뫼르소를 배제한 채 그의 죄를 논합니다. 검사는 가정 그 자체인 가설로 뫼르소의 죄를 확정하고, 변호사는 뫼르소가 말한 진실을 무시한 채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의 죄를 변호하며 판사는 두 거짓 사이에서 어떤 거짓이 더 믿음직한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마 카뮈가 말하려고 하는 유희와 부조리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초대를 하지만 정작 뫼르소는 참석을 거부합니다. 사회는 뫼르소에게 피고로서의 역할을 요구하지만 자기가 생각할 때는 자신의 살인 행위가 예전 자신의 행위들과 연결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거부하고, 사회의 판에 박힌 재판이라는 관습에 거부하는 뫼르소는 이렇게 혼자 동떨어진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P : 나는 내 인물을 통해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 보려고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카뮈는 미국판 서문에서 뫼르소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원죄를 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뫼르소는 부조리를 강요하는 세상에 결연한 자세로 맞서 사형당합니다. 저는 어찌 된 영문인지 카뮈가 그린 뫼르소가 그리스도와 겹쳐 보였습니다. 할 말이 더 많지만 부조리, 관습을 비웃는 카뮈의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끝내겠습니다.
P :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PS : 언젠가 다시 소개할 이방인에서는 다른 관점으로 한번 더 소개할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