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 시스템이그만큼허술하진 않다
정치적 중립만큼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기 힘든 가치가 있을까. 그 모호성 때문에 객관적인 보도를 해야 하는 언론사들은 골머리를 앓곤 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차지 않는 보도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반면 같은 기사라도 어떤 이들은 객관적 보도라며 손뼉을 친다. 이처럼 정치적 중립을 두고 고심이 깊은 집단은 언론만이 아니다. 검찰과 감사원 등 사정기관은 정치적 중립이란 모호한 가치를 두고 비판과 찬사라는 냉온탕을 끊임없이 오간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사퇴했다. 임기 4년 중 6개월을 남긴 시점이다. 사퇴의 변을 통해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대권 행보를 염두에 두고 사퇴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이를 두고 정부의 고위공무원이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해 사정기관을 이용했다는 비판과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기관장이 정부의 압력에 내밀리듯 쫓겨난 것이라는 평가가 엇갈리는 형국이다.
기실 권력자의 입장에서 정치적 중립은 달갑지 않은 구호다. 권력자는 정부 기관이 자신의 의지대로 작동하길 바랄 터다. 특히나 ‘칼’에 비유되곤 하는 사정기관들은 정치적 중립을 쉽게 훼손당하곤 한다. 다행인 사실은 우리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그만큼 허술하진 않다는 것이다. 논란이 되는 감사원장직은 헌법이 유일하게 임기(4년)를 보장하는 사정기관장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고, 보장된 임기 동안 착실히 와치독(Watchdog)의 역할을 수행하라는 요구다.
최 전 원장이 대권 주자로 부상한 시점은 월성원전1호기 경제성 평가조작과 관련한 감사를 벌이면 서다.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반하는 감사로 여겨지며 여권의 비판을 받았지만, 야당은 외려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정당한 감사라며 찬사에 나섰다. 최 전 원장은 차기 대권 주자 여론조사에도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정권의 기관장이 정권의 대항마로 여겨지는 아이러니가 펼쳐졌다. 감사원의 와치독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당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최 전 원장은 정권의 주요 정책을 겨눈 감사를 지속했다. 헌법에 의해 임기를 보장받는 감사원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잘 작동한 셈이다. 그러나 최 전 원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선 출마를 묻는 질문에 모호한 답변을 하며, 대선 행보로 읽힐만한 언행을 지속했다. 급기야 그러한 최 전 원장의 태도가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한다는 감사원 직원들의 우려도 제기됐다.
정치적 중립을 사수했다는 감사원장이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다는 우려를 받으며 사퇴한 상황. 대선판으로 직행한 최초의 감사원장이라는 점에서 향후 최 전 원장의 움직임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예정이다. 그의 당선 가능성과는 별개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