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정부사업 지원의 계절이 왔다. 창업보육센터에서는 '중소벤처기업부 창업지원사업 통합공고문'이 떴으니 참고하라는 메일이 왔다. 100여쪽 되는 사업목록과 내용을 훑으면서 우리팀이 지원할 만한 사업에 형광펜을 긋고 해당 사이트에 들어가 신청서가 있는지 들여다보길 5시간째...
몇 건의 사업 신청서를 다운로드 해 읽어내려가는데 창업 동기를 쓰라는 대목에서부터 벌써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려는데 동기를 쓰라니...
나는 내가 자살할까 봐 사업을 시작했다.
나는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방산 마을이 싫었다. 360도를 빙그르르 둘러봐도 산과 논뿐인 시골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루에 버스가 겨우 다섯 번만 들어오는 코딱지만한 마을이 늘 답답했고, 과자를 사려면 자전거를 타고 40분을 달려 읍내에 나가야 하는 좁디좁은 인프라가 슬펐다. 영화관을 중학생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가 봤는데, 남원 영화관은 우리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무려 40분이나 나가야 겨우 한 곳이 있었다.
20대 부푼 꿈을 안고 엄마가 마지막으로 도와준다면서 준 대학원 등록금과 한 학기 동안 하루 세 탕씩 알바를 뛰어가며 모은 얼마간의 돈을 환전해서 가족 몰래 중국 어학연수를 등록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정말 거지처럼 살았다. 하루 한 끼만 먹은 적도 많았고, 어떤 날은 그 한 끼 먹을 돈도 없어서 요플레 하나를 사서 물을 잔뜩 타 마시는 걸로 때운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상하이의 한 한국어학원에 취직해 강사로 일했는데, 원장이 학원 사정이 어렵다며 월급을 늘 반만 주었다. 상하이의 물가는 서울과 같았는데, 월급 80 중에 40만 받으면서 살려니 먹고사는 게 늘 팍팍했다. 나는 매일 삼각김밥 하나도 부들부들거리면서 사 먹는데 어느 날 원장이 가족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만 눈이 돌아버렸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일개 강사가 원장에게 월급을 달라고 한들 중국의 노동법 적용을 받지 않는 '외노자'의 말을 들어줄리 없었다. 궁리 끝에 출강을 나가던 회사의 과장에게 넌지시 흘렸고, 거래처 과장으로부터 강사 월급을 안 주는 악덕 학원장으로 찍힌 원장은 내게 씨팔저팔년개년 하면서 몇 시간 욕을 해댔다. 평생 먹을치 욕을 다 먹고 나는 월급을 받아 태국으로 갔다.
태국의 한 국립대학에서 한국어강사로 일을 하게 될 줄 알고 갔는데 뜻밖에 당신 대신 석사 학위 과정을 대리로 이수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아직 내 석사 과정도 안 끝났는데, 어떻게 남의 석사를 대신 밟아주냐고 교수에게 항의하니, 그 교수는 어느날 밤에 나를 찾아와 차에 태워 산에 끌고 갔다. 태국은 치외법권이라 너 따위는 여기서 쥐도 새로 모르게 죽여버려도 자긴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을 거라며, 죽고 싶지 않으면 잠자코 말 들으라고 했다. 그날 밤 그가 트렁크에서 꺼내며 주먹에 감던 흰색 헬스장 타월과 내 앞으로 걸어오는 그의 등 뒤로 비치던 자동차 헤드라이터 불빛은 10년이 넘은 지금에도 뇌리에 박제된 듯 선명하다. 나는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새벽에 부랴부랴 짐을 싸 태국을 빠져나왔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인천공항에서 얼마간 노숙을 하였다. 중국에서 받은 밀린 월급을 태국에서 생활하면서,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값으로 다 써버린 뒤였고 나는 정말 생거지가 되어서 먹고 살 것이 막막했다. 그 뒤로 벼룩신문, 구인사이트를 뒤져가며 낮에는 알바를 하고, 밤에는 찜질방에서 자면서 생활했다.
그러다 한 예식장에 취직해서 돈을 모았고, 태국의 교수에게 꼭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졸업을 했다. 한국어 전문가가 되어서 정부기관에 들어가 태국의 교수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당초의 계획과 달리 나는 사전을 만드는 기관에 취직하게 되었고 잠깐 행복했다. 그리고 2년 뒤 국외 출장지에서 임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성추행 사건보다도 1년 넘게 내 탓이라고 떠넘기는,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유난하게 군다는 말들과 자꾸 그렇게 말을 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해버리겠다는 협박들 때문에 돌 것 같았다. 우울증이 와서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1년 동안 홀로 나름의 투쟁을 한 끝에 임원이 그만둔다고 하기에 정말 그런 줄 알고 나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시는 공부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호텔에 들어갔다. 호텔 일에 재미를 붙여 우울증도 나아가고 정말로 호텔리어로 살려고 영종도 호텔의 카지노에 지원해서 교육을 받고 있는데 그 임원이 그만두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투서했다.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렸고, 조사 끝에 나는 복귀했다.
복귀해서 5년 정도를 더 근무하다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자 사직을 했는데 전세사기를 당했다. 소송까지 해서 승소했지만 집주인은 잠수를 탔고, 내 전세금을 변제할 능력이 안 되어 경매를 넘겨도 돈을 찾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사는 게 참 재미가 없었다. 사는 게 너무 피곤해서 이제 그만 살고 싶었다. 절망하거나 좌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죽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때즈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는 책이 유행했더랬는데 나는 떡볶이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어느 날 정말 내가 스스로 그만 살 것 같아서.
국밥을 먹다가 갑자기 억한 마음이 차올랐다. 어차피 이렇게 일어설 만하면 재수없는 사건들이 하나씩 찾아와 나를 들이박으니 이번에는 아주 내가 찾아가마 했다. 사건이 찾아올 틈을 주지 않고 올 법한 사건들은 내가 먼저 찾아가 까부셔 버리겠다고 마음 먹었다. 세게 부딪쳐 죽을 힘으로 세상이란 벽을 타겠다고 결심했다. 가 보자. 이런 ㅅㅂ 쉑히 세상. 그런다고 내가 죽나.
누군가는 전세금을 날릴 판에 해외에 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 여기에서 어떻게든 전세금을 찾을 방책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나를 한심하게 여겼지만, 세상을 향해 세게 돌진하겠다고 맘을 먹고 나니 시간이 아까워졌다. 그런 거지 같은 집주인과 째째한 사건들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았다. 변호사에게 맡겼으니 나는 내가 가기로 한 길을 성큼성큼 가보자 했다.
그래서 '빨리 사업을 성공시키겠다. 돈을 왕창 벌겠다.'는 목표가 없다. 최대한 천천히 단단하게 내게 충분한 살 이유를 부여하면서 가보기로 했다.
됐다. 창업 동기는 무슨 창업 동기냐. 자살 안 하려고 사업 시작했다고 쓸 수는 없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