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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수 Nov 17. 2020

책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다

한 개인의 소소한 공간 연대기_08화  


이래저래 생각을 해보아도 방법은 딱 하나였다. 우리 집에 있는 책꽂이를 손수 만들어 준 친구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컨디션 난조에도 친구는 흔쾌히 ‘좋다’는 답을 보내왔다. 


‘아,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날 밤 나는 거실 도면과 내가 생각한 책꽂이 샘플을 그려 친구에게 보냈다. 물론 참고용으로. 서로의 의견을 나눈 다음 이번에는 친구가 책꽂이 도면을 보내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친구에게 보낸 책꽂이 도면


20일 정도 후에 친구는 완성된 책꽂이를 사진으로 보내왔다. 감동 또 감동, 4미터가 넘는 책꽂이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날은 이사하는 날보다 더 설렜다. 어머니 역시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문 앞에서 책꽂이를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는 엘리베이터에서 책꽂이가 내려지자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 


책꽂이를 보는 순간 당신이 살아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쳤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회환과 고생, 책에 얽힌 어머니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이 한순간에 스쳐가면서 가슴속에 있던 수많은 감정이 어우러져 울컥하면서 눈물로 흘러내렸으리라. 어머니의 눈물을 애써 못 본 척했지만, 그런 어머니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책은 당신의 인생을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고, 자신을 대변해 주는 존재였다. 어머니 눈물을 보면서 내 마음도 울컥했다. 기분 좋은 울컥 이었다.  


외국 여행을 다니면서 하나 둘 모은 머그컵과 책 진열은 남편이 맡았다. 2~3일 정도 천천히 정리를 끝내자 내가 원하는 거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책꽂이 앞에 긴 책상, 그리고 어머니가 편하게 독서를 할 수 있는 1인용 의자, 거실 벽과 부엌으로 이어지는 벽면에는 그동안 한 점, 두 점 모아 왔던 그림을 진열하니 가정집이라기보다는 갤러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엌-시원한 통창과 절제된 살림살이

부엌의 포인트는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시원한 통창. 싱크대 앞에 서면 멀리 북한산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부엌을 원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꼭 필요한 살림살이만 놓기로 했다. 


처음에는 상부장 대신 창문 좌우로 선반을 달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사를 하고 나니 굳이 선반을 달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선반 위에 올릴 생각이었던 주전자들과 몇 가지 장식품은 일렬로 싱크대 위에 놓고 벽은 깨끗이 비워놓았다. 아일랜드 식탁은 생각보다 효용도가 높았다. 수납은 물론 간단한 음식을 만들 때, 커피를 탈 때나 식탁에 음식을 내놓을 때 편리했다. 아일랜드 식탁 아래 수납공간은 손님용 컵과 접시, 냅킨, 컵 받침 등을 넣었다. 아일랜드 식탁은 부엌과 식탁, 부엌과 거실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안방-독립된 생활이 가능한 집 속의 집

어머니에게는 이전 집보다 두 배가 넓은 안방과 안방과 연결된 개인 욕실, 그리고 욕실 앞 복도에 옷장과 서랍장이 생겼다. 거실에 손님이 와도 어머니는 개인 생활에 침해받지 않는 생활이 가능했다. 예전 책꽂이와 이전 집 거실에 있던 소파, 교자상을 어머니 방으로 배치했다. 욕실까지 갖춘 안방은 어머니가 자고 책 읽고, TV도 보면서 독립된 생활이 가능한 집 속의 집이 되었다. 


고전방-목포의 자개장, 서울에서 피다

낡고 오래된 것, 손 때 묻은 것을 좋아하는 덕에 집에 있는 고가구 몇 개는 누군가가 쓰다가 버린 것이다. 2020년 1월 목포로 여행을 갔었다. 근대역사관 근처 골목길, 문이 닫힌 가게 안에 자개장이 놓여 있었다. 그 자개장을 보는 순간 영감이 떠올랐다. 이사 갈 집 방 하나를 한국 전통 스타일, 일명 '고전방'으로 꾸미기로 정했다. 


목포에 오면 꼭 탄다는 해상 케이블카는 타지 않고 남편과 자개장을 찾아 재활용센터를 세 군데나 돌았다. 운 좋게 한 곳에서 자개장 문짝과 문갑, 고가구 문갑을 비교적 싸게 샀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이동하느냐였지만 일단 사고 봤다. 뭐 어떻게든 방법은 있지 않겠는가? 


일단 자개 문짝 2개는 차에 싣고 나머지는 ‘다음 주에 찾으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차 렌트 비용에 기름값에 통행료까지 생각하니 왕복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하루에 무리해서 오가기도 힘든 거리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화물택배가 있다고 했다. 정기화물을 취급하는 곳에 전화를 해서 주소를 주고 자개 문짝 2개, 자개 문갑과 고가구 문갑의 배송을 부탁했다. 


이사 후 어머니 방 옆방을 '고전방'으로 정하고 자개 문짝 4개를 이어 붙여 병풍을 만들고, 문갑과 가지고 있던 소반을 놓으니 한국적인 멋과 전통이 살아 있는 방이 탄생했다. 뒤 베란다가 보이는 창문에는 창호지를 붙여 은은한 분위기를 살렸다. 어머니의 한복과 고무신 등으로 악센트를 주니 세월의 흔적과 전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비워놓았던 자리에 책꽂이가 들어온 날, 어머니는 '울컥'하며 감격의 눈문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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