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 고양이 네 마리
결혼 전 부모님이랑 같이 살던 아파트는 나의 유치원 시절부터 쭉 살아왔던 곳이다. 그동안에 앞 집 이웃들은 3번 정도 바뀌었는데, 엄마의 말에 따르면 이사 오는 사람들은 꼭 아이가 없다고 했다. 현재 살고 있는 분들도 젊은 부부인데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늘 두 분만 계시기에 추측으론 딩크족인 듯싶었다. 처음에는 앞 집에 고양이들이 있다는 걸 몰랐다. 약 2년 전 어느 날, 아침밥을 먹으러 나온 동생이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누나, 나 새벽에 게임하는데 누가 문을 사각사각 긁더라고"
"뭐? 뭐야 무섭게 왜 그래? 그때가 몇 시였는데?"
"한 새벽 3시 즈음? 그래서 문을 살짝 열어봤는데......"
문을 연 동생이 발견한 건 하얀색 고양이 한 마리였다. 그리고 앞 집은 문이 반 정도 열려있었다. 그 문 틈 사이로 회색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얀 고양이를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제야 앞 집에 고양이들이 산다는 걸 알아챘다. 그 사실을 자각한 이후로 고양이들이 자주 보였는데 나오는 시간대는 주로 밤 10시 반 ~ 11시 반 사이였다.
그때 당시에 나는 엄마랑 집 근처 헬스장에서 운동을 다녔는데 씻고 집에 오면 얼추 10시 반 정도 되었었다. 매번 문이 열려있지는 않았지만 혹시 오늘은 나와있을까 기대하며 엘리베이터를 탔었다. 고양이들이 놀고 있는 경우 11층에서 문이 딱 열리면 "띵" 도착하는 소리에 애들이 놀래서 후다닥 들어가는 뒷 꼬리만 보인다. 심쿵이다 정말. 처음엔 우리를 많이 경계했다. 한 번 문으로 들어가 버리면 다신 나오지 않았기에 놀아주지도 못했다. 집 안을 살짝 보면 현관 앞에 얌전히 앉아 빤히 우리를 볼 뿐이었다.
우리는 하얀색 고양이는 하양이로 회색 고양이는 회색이로 불렀다. 이름을 물어볼 정도로 앞 집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기에 그냥 그렇게 우리끼리 이름을 지어 불렀다. 하양이와 회색이의 우리 집 적응기는 이렇다.
1. 엘리베이터 소리에 놀라 숨던 시절. 안전한 집 안에서 우리를 관찰한다.
2. 우리 냄새를 이제 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가만히 앉아있는다.
3. 만지는 건 아직 허락 안 해준다. 자꾸 도망가지만 집 안으로 숨지는 않는다.
4. 만지는 게 가능하다. 우리 옷을 훑으며 탐색한다.
5. 이제 우리 집이 궁금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우리 집 문 앞에 앉아있다.
어느 순간부터 하양이는 우리 집을 궁금해하고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하더니 너네 집으로 가라고 쫓아내는 시늉이라도 하면 배를 보이고 드러눕기 시작했다. 귀여워서 배를 만져주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솜방망이로 내 손을 쳐낸다. 마치 '아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 빨리 문이나 열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도 앞 집처럼 문을 살짝 열어놓고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호기심 대장 하양이는 냉큼 들어와서 집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회색이는 처음엔 문 앞까지만 와있더니 나중엔 하양이랑 같이 집 안을 휘젓고 다녔다. 나랑 엄마는 혹시라도 애들이 다치거나 사고라도 칠까 봐 뒷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던 중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양이들은 두 마리가 아니었다. 하양이 회색이 콤비가 멀리까지 나가니까 남은 두 마리도 궁금했는지 자기네 집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 마리는 갈색, 남은 한 마리는 하양이랑 같은 종의 하얀색이었는데 갈기가 더 풍성한 게 느낌에 수컷인 듯싶었다.(정확히는 모른다.) 수컷 하양이 까지 집에 드나드는 동안에도 갈색이는 한 번도 우리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 경계심이 엄청난 듯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콤비들은 집에서 놀고 있었고 처음으로 수컷 하양이가 집에 방문했다. 우리는 최대한 놀라지 않게 하려고 움직임을 최소화해줬는데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온 게 변수가 되었다. 콤비들은 나가는 문도 익숙하게 잘 찾아 나가지만 수컷 하양이는 첫 방문이라 나가는 문을 못 찾고 베란다 화초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다가가면 도망가니까 문으로 유도하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화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으르렁 거리기 시작해서 이도 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앞 집주인을 정중히 모셔왔다. 그분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며 베란다 앞에서 수컷 하양이를 불렀다.
"아들~ 이제 그만 놀고 집에 가자~"
그러더니 놀랍게도 총총총 뛰어와서 자기 엄마(?) 품에 쏙 안기는 게 아닌가. 귀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이라고 부르는 게 좋아 보였다. 다들 사랑받으며 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 수컷 하양이는 다시는 우리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두 콤비들만 실컷 놀다가 나가곤 했다. 하루는 애들을 보내주면서 문을 닫으려는 찰나 "우리 아기들 잘 놀고 왔어?"라고 다정히 반겨주는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를 믿어주는(?) 느낌이 들어서 뭔가 묘했다. 사실 우리 고양이들 왜 맘대로 만지고 집에 들이냐고 싫어할 수도 있는데 우리 가족이 예뻐해주기도 하고 애들도 신나 하고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셨던 거 같다.
결혼 후 나는 출가했고 더 이상 고양이들을 볼 수가 없다. 가끔 집에 놀러 가면 엄마한테 물어보는데 하양이가 작은 방에 영역표시를 해서 이제는 집에 들이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냥 문 앞에서만 동생이 놀아주곤 했다는데 그마저도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고양이들을 마주치는 일이 더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집 안에서 주인 사랑 듬뿍 받으며 잘 크고 있지 않을까? 길을 걷다가 길고양이라도 마주치면 항상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