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투라》 24년 9월 호 '예술-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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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잡지를 좀 읽으려 한다.
일간지 기자를 거쳐 단행본 편집자로 일하다 보니 담론-현실의 시차와 매체 간 차이를 꾸준히 의식하게 된다. 국내 계간지들을 매개 삼아 90년대를 역사화하는 윤여일의 저작을 읽은 뒤로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이번 호 《쿨투라》를 읽게 된 건 단순한 동기에서다.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오랫동안 관심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예술의 효용 따위를 자문하고 회의하고, 그러다가 저주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풀리는 종류의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게 됐을 뿐이다. 관건은 계속하는 데 있다. 이유를 캐묻는 게 아니라.
뭔가를 물어야 한다면, 근거보다는 좌표와 벡터를 묻는 편이 ‘대체로’ 낫다. 어쨌거나 계속 읽고 쓸 생각이라면.
《쿨투라》는 담론 구축보다는 정보 전달 성격이 강하다. 구체적인 현실을 진단하고 사태에 개입하려는 의지가 옅어 뵌다. 각종 전시에 대한 소개글은 재미있지만…
지금 한국에서 예술은 정치와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가? 다섯 편의 테마기사는 이 물음을 충분히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벨트를 질끈 동여맬 따름이다. 비평에는 불필요한 태도다. 운전을 할 때라면 몰라도.
그래도 문예비평가 출신 1호 국회의원인 강유정과의 인터뷰는 흥미로웠다. 작금의 문예/비평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상황에서, 현실정치에 뛰어든 강의원의 목소리는 확실히 눈길을 끌었다. “문화예술은 삶의 보충재 혹은 사치재가 아니라 필연적 산물이자 요구이고 매개”라는 선언에는 파고들 만한 가치가 있다.
올 초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정부가 취약 계층에 무료 OTT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기사였는데 부정적인 여론이 적지 않았다. 그닥 놀랍지 않게도, 논쟁은 대부분 ‘먹고사니즘’ 수준에 그쳤다. 많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가난뱅이에게 문화는 사치라는 생각이 박혀 있다.
챌린지 문화를 소개하기 전에 여기 먼저 개입해야 하지 않나. 2024년 한국의 문화지라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해리스 지지 선언을 보고 든 생각인데, 연예인의 정치 참여 문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아래는 다섯 편의 테마기사에 관한 단평이다.
최선희의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을까?」는 뱅크시에서 아이웨이웨이를 거쳐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긍정하는 글이다. 요지에는 동의하지만, 딜레마를 좀더 깊이 제기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뱅크시만 하더라도 훨씬 흥미로운 모순을 품고 있지 않나. “뱅크시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바로 그것, 백만장자의 집을 꾸미는 트로피가 되었다.”(『뱅크시 벽 뒤의 남자』 中)
강성률의 「역사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 영화계」는 〈건국전쟁〉과 〈파묘〉로 표상되는 요사이 한국 영화계의 담론 투쟁을 기술하다가 “영화판이 정치판이 되고 말았다”는 한숨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의 한탄은 명백히 한쪽을 겨냥하고 있음이 “대통령 지지율과 뉴라이트 옹호 수치” 등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지지하진 않지만, 이럴 거라면 짐짓 중립적인 체하기보다는 〈건국전쟁〉에 대놓고 싸움을 거는 편이 나을 것이다.
허희의 「국가의 법과 사랑의 주체」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를 다룬 두 편의 희곡을 통해 ‘법에 우선하는 개인의 윤리’라는 안티고네적 테마를 다루는 글이다. 동시대 이슈를 다루진 않지만 본질적인 주제를 한국적 텍스트와 접합시켜 역사적으로 독해한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다.
최연정의 「예술에 있어 ‘PC’함」은 가장 짜증 나는 글이었다. PC주의에 호의적임이 뻔한데도 안 그런 척하는 건 둘째치고, 하이데거를 길게 인용하면서 예술과 정치의 불가분성을 강조하는 대목도 지겹다. 굳이 하이데거씩 끌어올 필요가 없는 나이브한 얘기다. 이 글은 차라리 PC주의적 예술 실천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글이 됐어야 한다. 나야 PC주의 자체를 싫어하지만, 그 편이 읽기엔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김세은의 「지금 무슨 노래 듣고 계세요?」는 ‘취향’과 ‘정체성’을 동일시하지 말자는, 가볍게 읽을 만한 에세이인데, 동의하고 싶진 않다. “취향은 취향일 뿐 인생을 걸지 말자”는 얼핏 합리적으로 들리는 슬로건을 부제로 내걸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현대의 문제는 취향에의 지나친 진지함이 아니라 지나친 가벼움이다. 유운성의 말마따나, ‘취향 존중’이란 네가 뭘 좋아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냉소주의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그것보단 훨씬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