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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lly Feb 05. 2022

이데아론과 질료형상론 비교

플라톤의 이데아론

     

  점점 끝이 보이는 우리 관계, 그녀를 붙잡기 위해 마지막 한마디를 꺼냈다. “사랑해” 그러자 예상치 못한 답변이 그녀에게서 돌아왔다. “사랑이 어디 있어?” 내 놀람에 아랑곳 않고 그녀는 말했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사랑이 도대체 어디 있어? 몇 마디 말은 들리지만, 그렇게 쉬운 말들은 공허할 뿐이야. 뭐라고 말하든 이제 늦었어.” 그렇게 그녀는 내 인생에서 완전히 떠나버렸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데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일까? 고민하는 내게 누군가가 말했다. “사랑은 이데아야. 이데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오로지 마음과 이성으로만 볼 수 있는거야.” 이데아는 ‘보다, 알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idein'에서 비롯된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데아를 직접 느낄 수는 없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세상 모든 사물의 이상적인 모습으로서, 이데아를 간직하고 있다. 이런 이데아 개념을 처음 가져온 사람이 플라톤이다.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어?”라고 묻는 것은 “이데아를 어떻게 느낄 수 있어?”라고 묻는 것과 같다. 오로지 정신 즉’지(知)‘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위에서 남녀간의 대화를 통해 비춰진 이데아(Idea)론은 플라톤이 처음 주장한 형이상학 이론이다. 플라톤은 진리를 찾는 것에 집중한 철학자이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를 통해서 감각적 경험은 믿을 수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인 철학자였다. 감각적 경험의 대상은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다 변화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변화하는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이런 생각은 이데아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 “이데아 개념은 근본적으로 불변이며 영원하고 비물질적인 본질로서, 우리가 보고 감각하는 현실적, 시각적 대상들은 단지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본원적인 삼각형의 형상(이데아)이 있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삼각형은 단지 이데아로서의 삼각형의 형상이 비추어진 것이며, 비물질적인 형상이나 이데아를 참된 실재로서 내세웠다. 플라톤은 지식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사유의 참된 대상은 물질적 질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이데아의 질서이기 때문이었다. 한 아름다운 인간은 보편적인 미의 모사(模寫)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인간은 많든 적든 그 이데아를 분유(分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우리는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인물을 통해 아름다움을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제한된 형태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에 우리는 곧 한 형태의 아름다움은 다른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체득 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한 특정한 물체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미(美)의 모든 양태들은 어떤 유사성을 갖는다는 이러한 발견의 결과로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완화되면서 아름다운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미의 개념에로 옮겨가게 된다. ‘아름다움’, ‘용기’, ‘우정’ 이런 개념의 정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말한 남녀간의 대화가 플라톤이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화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가시적인 물리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나눈다. 물리적인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파생된 세계로서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는 상기를 통해서 참다운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해야만 한다. 그는 우리가 이데아를 쫒지만 이는 기술적 모방에 불과하며 진리는 결코 모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형식이나 기능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내용이다. 마치 용기와 우정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서의 이데아는 감각적인 대상도 아니고 시공간적 대상도 아니며 심리적인 대상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관념적인 실재이다. 이러한 이데아는 영원불변하는 이상형으로서 우리의 생각의 대상이 된다. 스스로 유일하며 영원한 이데아는 다양성으로 구성된 물리적인 세계에 관여하게 된다. 이렇듯 플라톤은 물질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 사람이라면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다음은 플라톤이 그의 제자들에게 한 질문이다. "자네들은 개를 본 적 있나?"이 질문을 가지고 평생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물음의 뜻은 이렇다. 이 세상에 '개'라는 개라는 없다는 것이다. “진돗개, 치와와, 삽살개 등 수많은 개들이 있지만 '개'라는 완전한 '개'그 자체로의 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설명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완전한 개는 바로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즉 현 세계에 있는 개들은 그 '그림자'일 뿐이요, 따라서 그는 현 세계를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라고 설명한다. 그림자는 빛이 가까이 다가가면 작아지고 멀어지면 길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 세계의 물질들은 같은 개념을 가지면서도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즉,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의 플라톤의 주장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논리로 반박한다. 우리의 세계는 보편적인 측면과 특수한 측면으로 나뉘어져 있다. 보편적인 측면이란 그 사물의 본질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들었던 예 중에 하나를 들어보자면, 책상의 예가 있다. 책상은 나무로 만든 책상도 있고 철로 만든 책상도 있고 수많은 종류가 있다. 플라톤의 설명에 의하면 완전한 책상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책상의 본질을 보편적 측면 이라고 한다. 즉 나무로 만들었든, 철로 만들었든 책상의 용도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보편적 측면을 그는 '형상'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책상은 나무, 철 등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나무와 철은 같은 책상인데도 다른 재료이다. 즉, 이것은 책상의 특수한 측면이다. 이를 '질료'라고 한다. 이런 보편적 측면인 '형상'과 특수한 측면인 '질료'가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을까? 잘 생각해 보자. 그냥 나무(질료)를 보고 책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나무가 깎여지고 다듬어져 그의 용도(형상)로 쓰여 졌을 때야 비로서 우리는 그것을 책상이라고 부른다. 

그럼 다시 플라톤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그의 물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라는 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세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개는 보편적 측면인 '형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그 본질만을 정의해 놓은 것이 '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수한 측면인 '질료'가 빠져있다. 따라서 개라는 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데아 세계 역시 '형상'만 있고 '질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를 만질 수도 있고 쓰다듬을 쓰도 있다. 만약 이것들이 그림자라면 어떻게 만지고 느낄 수 있을까? 형광등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이런 여러 형광등의 본질인 완전한 형광들이 있다면, 플라톤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쓰는 형광등은 그림자인가? 그림자가 빛나기도 하나? 말이 안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점을 비판한 것이다.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보편적인 측면인 '형상'만으로는 물질을 이룰 수는 없다. 이 세계는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은 몇 가지 예로도 금방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이데아라는 것은 완전한 세계를 말한다. 현실세계는 그림자일 뿐이다. 플라톤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완전한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를 가 본적도,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걸까? 이런 제자의 질문에 플라톤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가 육체에 들어올 때 건너면 모든 것을 잊게 되는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을 건너서 오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죽으면 다시 영혼의 세계인 이데아로 가게 된다고 말이다. 이건 왠지 동양의 저승론과 비슷하다. 증명할 수도 없는 말을 하고 그런 볼 수도 없는 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은 이미 학문이 아니라 종교 수준으로 넘어간 것 아닐까?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 비교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와 현실세계로 이원론적으로 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가 하나가 된 실체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일(一)과 다(多)에서 플라톤은 전자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를, 보편과 개체에서 플라톤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보편이라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에 근거해 개체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리스철학의 전통에서 플라톤은 표면에 드러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배후로 들어가는 것을 주도했다. 표면의 배후에 있는 더 깊고 근본적인 세계를 연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표피라는 피상적인 부분을 고집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그것 자체로 엄청난 풍요이자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파악한 것이다. 우리가 철학을 위해 굳이 그 대상을 넘어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실상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 일관성 있게 이뤄지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진리의 원천을 찾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는 진리를 세계 속에 있는 존재들이 주관적인 감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진리는 불변하기 때문에 무한한 자기 동일성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감각은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는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자들의 원형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데아에 대한 인식은 영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영혼, 정신, 순수한 사고로 이미 이데아를 경험했기 때문에 생득적이지만 감각의 세계에 육체와 함께 발을 디딤으로써 이데아를 상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세계 속의 우리들은 동굴의 비유에 나타나는 그림자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이데아는 나무의 이데아, 책상의 이데아와 같이 어떤 원형이 존재하는 것으로 동굴에서 벗어나서 볼 수 있는 그림자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이며 플라톤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림자들, 어떤 개별의 것들의 원형이 있어야 그를 닮은 개별자들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원형은 모든 개체들이 관여하는 형상을 바탕으로 하는 데 이 때의 형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에서의 공통점이자 차이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 역시 형상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그 역할과 방식이 차이점으로 나타난다. 이데아론이 원형을 상정하고 그것을 닮은 개별자들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이데아를 진리의 세계로 보았던 것과 달리 질료 형상론은 세계 속의 개별자들을 질료와 형상으로 설명하며 형상이 최종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을 규정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형상은 개체들 사이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현실에 존재하는 개체들은 형상을 이미 지닌 것이기 때문에 현실태로 보았다. 이러한 형상은 항상 보편적이며 제이의 실체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보편 속에서 시공간에 박힌 가능태, 질료를 제시함으로써 개별자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때, 질료와 형상은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둘이 합쳐져 제일실체가 된다. 


 이데아론에서 플라톤은 참된 존재를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 종속에 있다고 보았고 형상이 보편적일수록 이데아에 가까운 실재에 다다른다고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형상이 보편적일수록 덜 실재적이라고 보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진리의 세계와 현실 세계의 상하 수직의 문제의 답은 용어는 상이할지라도 근본 개념이 비슷하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밑에서부터, 구체적인 개별 개체들에서 진리를 찾았다면 플라톤은 위에서부터, 이데아에서 진리를 찾은 것이다.


 이 둘의 이론은 서로 닮았으며 상호보완적으로 보인다. 분명 진리를 감각적인 방법으로만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따라서 이데아의 존재는 타당하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점들 또한 타당하다. 예를 들어 제 3인간이나 이데아가 현실 사물들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물들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나 특히, 동적인 운동의 근원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질료와 형상으로 설명하려 하였지만 결국 이데아로 귀결되는  듯한 설명들은 충분히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진리 그 자체나 신과 같은 절대성의 담지체 혹은 속성들의 존재 기초를 설명하는 데에 좀 더 설득성을 가져야할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실체들의 속성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데에 더 설득력을 가져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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