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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미 Sep 06. 2023

나의 은퇴일기

나는 2023년 8월 31일 자로 마침내 정년퇴직을 하였다. 27년 반 동안 교직에 있었는데 어떤 때는 의욕에 차서 강의를 하고 논문을 쓰고 학회 일을 하고 또 어떤 때는 체력이 달리는 것 같아서 최소한의 일만 하기도 했다. 의욕적으로 일한 것은 마지막 연구년 이전까지였던 것 같다. 마지막 연구년은 2019년이었는데 2020년 학교로 복귀하자마자 코로나가 창궐하여 대면수업을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동영상 강의로 전환하고 학기 후반에는 줌 수업을 하느라 학생들을 전혀 만날 수가 없었다. 2020년은 내가 교직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 이후도 계속 온라인 수업과 대면수업을 병행했다. 학교가 완전히 정상화된 것은 2022년 2학기였던 것 같다. 안 그래도 쉽게 피곤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는데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날 수도 없고 하니 더 힘이 들었다. 그래서 2020년 이후 나는 무기력한 말년병장 같은 나날을 보냈다. 말년병장은 제대의 희망이라도 있겠지만 나는 퇴직일자가 뻔히 보이는데도 별로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은퇴일이 가까워 오자 연구실을 어떻게 비워야 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마지막 학기에도 연구실 물건들을 하나도 치우지 않았다. 근 30년간의 교직 생활로 책이 엄청 많았는데 책을 가져가겠다는 사람도 기관도 없으니

책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상태가 양호한 책들을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져다 팔기로 했다. 바코드를 스캔해서 팔 수 있는 책들을 알라딘에 가져다 팔았다. 그런데 알라딘에서는 내가 가져간 책들을 절반 정도 밖에는 사질 않았다. 과거 연구실에 에어컨이 들어오지 않아서 책에 곰팡이가 피곤했기 때문이다. 무겁게 가져간 책들을 절반을 다시 가져갈 때는 힘이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신중하게 선택한 

책들이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한글 책들은 판매할 수 있었지만 영어로 된 책들은 아예 가져가 보지도 못했다. 

후학들이 책을 가져가 주면 좋겠지만 요즘 젊은 교수들은 책을 사지 않고 논문 등은 다운로드한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스크롤하면서 컴퓨터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 종이장을 넘기는 것이 좋던데. 자료를 다운로드하는 젊은 교수들과 세대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은퇴를 할 때가 된 것이겠지 생각했다. 결국 그 많은 책들과 책장들은 8월 초가 되어서야 많은 비용을 내고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비워지고 있는 연구실을 보니 

그동안 그 연구실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참 감사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침 새벽 일찍 학교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일찍 연구실에 가서 커피를 내리고 하루 일과를 여는 간단한 기도를 하곤 했다. 딱히 내가 믿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나에게 다짐하는 의미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남들은 저녁에 쓰는 일기를 아침에 썼다. 그 시간이 내가 혼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은퇴를 한 지금은 그렇게 연구실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걸 느낀다. 은퇴를 해서 여러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아마 가장 아쉬운 점은 나 혼자 독점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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