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에서 마흔 사이 격동의 시간
발리 여행 다음 해에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어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여행 좋아하는 사람에게 코로나는 창살 없는 감옥이자 고문이었다. 모든 학교가 문을 닫고 학원도 쉬었다. 아이 학교가 기한 없이 9개월을 닫을 줄 예상을 못했던 때이고 내가 일하던 영어유치원과 어학원이 연계된 일터도 코로나 감염을 우려하여 전체 인원이 절반이상 퇴원하며 몇 달간 휴원을 하기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도 쉬어가기로 했다.
팬데믹 가운데 서른아홉이 된 나는 마흔을 목전에 두고 격동의 마흔 앓이를 시작한다. 주말부부로 8년간 아이 둘을 키우며 30대를 바쁘게 보내고 어느 날 눈뜨니 앞자리 나이가 곧 4로 바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30대에 아무것도 이뤄놓은 게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인생에서 10년을 도둑맞은 느낌과 함께 '불혹'이라는 엄중한 단어의 중년이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불혹'을 네이버에 검색해 봤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이 나이대만 되어도 거의 노인 취급을 받았다, 공자가 논어 위정 편에서 나이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다고 말한 데서 40세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중년의 시작이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나이가 주는 무게감을 처음 느껴봤다.
운전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이 안 보이게 흐르거나 장을 본 후 커피를 주문하며 결제 카드를 내미는데 난데없이 눈물이 흘러 카드를 건네받은 사장님도 당황하고 나도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상황이 몇 번 반복됐다. 눈물은 슬픈 상황이거나 내가 속상해서 우는 게 아닌 나조차 왜 우는지 이유를 모르는 눈물이 있다는 것도, 지나고 나서야 그 당시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교가 언제 개학을 할지, 사회가 언제 정상이 될지 미래를 예상하지 못하는 팬데믹 속에 주말부부 8년을 하며 스스로 삭였던 힘겨웠던 순간들이 마흔 앓이와 함께 돌풍처럼 내 마음을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친구라도 만나 수다 떨고 사회생활이라도 하면 그저 지나갔을 순간이건만 모든 게 정지되었던 그 상황 속에 꼼짝없이 내몰렸던 것 같다.
아버지가 의사이고 자신도 우울증으로 약을 먹고 있는 친구가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야. 고민하지 말고 가서 상담해 봐,라고 용기를 주었다. 내 발로 처음 정신과를 찾아갔다. 코로나 기간의 정신과는 대기 환자만 서른 명은 넘어 보였다. 옆에 아주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길래 네?라고 대답을 하였는데 나에게 말을 건넨 게 아니었다. 내 뒤 벽을 보고 혼잣말을 하는 거였다. 대기실을 둘러본 뒤 나만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갈까 말까 몇 번 고민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으니 의사 선생님께 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는지는 물어보고 싶었다. 우울이란 단어와 친하지 않아 증세를 전혀 몰랐다. 선생님이 뇌파 검사를 권유하셨는데 스트레스가 꽉 차 그렇지 심한 단계는 아니라고 처방해 준 약을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였다. 이틀 먹고는 그만두었다.
약을 먹으니 기분이 너무 가라앉고 잠도 많이 와서 아이 둘을 돌보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서 정신과에 상담을 해본 것에 의의를 두고 스스로 이겨내 보자,라고 마음먹었더니 거짓말처럼 갑자기 눈물이 나는 증상은 없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밝고 명랑해서 동네에서 방울이라고 불렸다. 항상 재미난 일, 즐거운 일을 스스로 만들어 찾아다녔던 나의 본모습을 찾고자 아이들과 함께 등산도 하고 산책도 하고 도시락 싸서 사람 없는 곳 찾아 우리만의 아지트를 산 곳곳에 만들었다. 해를 많이 쐬고 쉴 새 없이 몸이 바쁜 일들을 만들어내며 어두운 기운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썼다.
"30대에 이뤄놓은 게 없기는, 보석 같은 두 아이를 출산하고 혼자서 이만큼을 키워냈는데, 도움을 많이 못줘서 미안하고 고맙다!" 남편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칠흑같이 어둡고 긴 터널을 빛을 찾아 끝까지 나왔다.
팬데믹도 끝이 보였다
마흔 먹도록 '우울'이란 감정을 살면서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세상은 너무 재미있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거기서 에너지를 얻고 내가 하고자 하면 어떻게든 도전하고 계속 두드려보고 안되면 깨끗이 포기하고 미련도 별로 없는 성격인데 나의 의지가 아닌 세상의 갑작스러운 '코로나 소용돌이'로 일도 그만두고 아이 둘을 하루 세끼씩 해먹이며 집에 콕 박혀서 언제 끝날지 모를 보이지 않는 전염병과 싸우는 상황이 집순이가 아닌 밖순이인 나에게 커다란 소용돌이로 다가왔다.
거기다 준비 안된 마흔 맞이까지 겹치다니. 나처럼 마흔을 거하게 맞이한 사람들에게 참 해줄 말이 많다. 도서관에서 '마흔'관련된 책은 코로나 기간 다 섭렵했다.
그렇게 마침내! 팬데믹의 끝이 보여서 떠난 싱가포르가 얼마나 좋았을까? 아이들이 2년 반동안 코로나에 얼마나 적응이 되었는지 사람들 많은 몰에 가니 놀라고 실내에서 밥 먹어야 하는데 마스크를 벗지 않으려 해서 처음엔 애를 먹었지만 말이다. 금융과 무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와 국적이 잘 어우러진 세련된 나라 싱가포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저 좋았다. 코로나 이후 첫 여행, 어딘들 안 좋을까.
코로나 전에 홍콩을 가보고 중화권 나라에 흥미를 잃었다. 어렸을 적 봐왔던 첨밀밀, 중경삼림, 영웅본색 속의 홍콩만 생각하고 6년 전 직접 본 홍콩의 갭이 너무 커 실망스러웠다. 세계제일의 미식의 나라인데 길거리 음식도 입에 잘 안 맞고 좁은 거리마다 흡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코를 틀어막고 다녀야 했다. 영어도 100% 통하지 않아 길을 물어봐도 중국식 영어로 답해주는 사람도 많아 한번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침사추이 숙소 반대편 건물의 창문을 통해 현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들이 보이고 에어컨이 없는지 죄다 웃통을 벗거나 메리야스 차림에 창문과 집안 곳곳에는 빨래를 잔뜩 널어놓은 채 사는데 보기만 해도 답답함이 들었다. 워낙 작은 면적의 땅에 값이 비싼 홍콩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니 당시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쇼핑으로도 유명한 홍콩이건만 내가 갔을 때는 한국인이 선호하는 모던하고 세련된 옷보다는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커다란 브랜드 로고가 박힌 그런 옷들이 많아서 쇼핑도 꽝, 미식도 꽝, 여행지의 쾌적함도 꽝. 그냥다 꽝이었다.
대신 여자아이들에게 예쁜 현지 브랜드 하나를 발견해서 합리적인 가격에 애들 옷과 신발과 소품 등을 많이 건져서 그거 하나 만족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싱가포르를 좀 더 쾌적한 버전의 홍콩이라고 생각하고 떠났다.
싱가포르 열흘 여행동안 3곳의 숙소를 예약했는데 도착 후 이틀은 쇼핑몰이 많은 중심부 오차드 로드 지역에 묵었다. 숙소에서 몇 분만 걸으면 이렇게 크고 작은 쇼핑몰 수십 개가 길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나베이 샌즈호텔의 왼쪽에는 꽃모양의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이 눈에 띈다. 싱가포르는 건물 디자인이 창의적이고 똑같은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한국에서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와 건물들만 보다가 색다르고 개성 넘치는 건물들을 보니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트 사이언스 뮤지엄에서는 퓨처월드 '팀랩'이 전시 중이었는데 한국에서도 여러 번 경험했던 전시라 패스할까 했지만 싱가포르에서 보는 것도 색다를 듯 해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 보았다. 대체로 한국 전시와 비슷했지만 사람이 그네를 하나씩 이동할 때마다 색이 바뀌는 곳은 신비로운 음악과 함께 한 사람씩 체험할 수 있어서 아이들이 흥미로워했다.
다리가 아파 올 때는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싱가포르는 지하철 또한 넓고 쾌적하고 정말 길에 쓰레기 하나 없었다. 싱가포르가 법이 엄격하다고 해서 애들한테 오기 전 껌을 씹어도 벌금 내야 한다고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는데 가는 곳곳 대체로 깨끗하고 길거리에 노숙자 한 명 볼 수 없어서 엄마 혼자 아이 데리고 첫 해외여행은 싱가포르를 추천한다.
홍콩에 살던 많은 외국계 회사 사람들이 일자리를 싱가포르로 옮겼다고 들었는데 같은 값으로 더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한국에 인접한 동남아 중에서 처음으로 살아보고 싶은 나라가 나에겐 싱가포르다. 치안도 자연환경도.
아시아 중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선진국에 GDP수준도 우리나라의 두 배인데 왠지 묶여서 동남아로 불리기엔 억울할 듯하다. 싱가포르는 도시자체가 랜드마크이다. 이렇게 작은 나라에 어쩜 이렇게 배치도 잘하고 오밀조밀 많은 것을 넣었을까? 첫날임에도 궁금증이 들었다. 내일은 자연 쪽을 둘러봐야겠다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