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바뀐 항공편! 하지만 오히려 좋잖아! 의도치 않은 치앙마이 탐방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4월 11일부터 15일까지, 치앙마이 송크란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일정을 계획했습니다. 공식 일정은 13일부터였고, 어렵게 연차를 맞춰 축제의 마지막 날까지 꽉 채운 여행이 될 예정이었죠. 그런데 출국을 며칠 앞두고 항공사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귀국편을 하루 앞당겼습니다. 여행사에 항의해 보았지만 돌아온 말은 “무료 취소 가능합니다”라는 안내뿐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비교적 P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여행만큼은 이상하리만치 J 성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동선과 시간을 꼼꼼히 계획하고, 그 흐름대로 움직여야 마음이 편안해지곤 합니다. 그래서 이번 일정 변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하루’일 수 있지만, 제게는 가장 기대되던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행은 언제나 기대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데,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고요. 어쩌면 우리는 계획대로 흘러가는 여행을 꿈꾸기보다는, 계획이 어긋났을 때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걸 안다고 덜 짜증 나는 건 아니지만, 모르면 더 지치는 건 맞습니다.
비행기 일정이 바뀌었을 땐 정말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막상 치앙마이에 도착해 보니, 애초에 세웠던 ‘축제 중심의 일정’에서 살짝 벗어난 덕분에 이 도시를 더 넓고, 더 천천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치앙마이는 어떤 도시일까?
치앙마이는 작지만 구조가 명확한 도시입니다. 지도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정사각형 형태의 올드타운인데요, 오래된 성곽과 해자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는 유서 깊은 사원들과 오래된 골목, 그리고 살아 숨 쉬는 로컬의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올드타운을 둘러싼 사방의 성문은 저마다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습니다. 이 도시를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네 개의 성문을 중심으로 움직여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북문(창푸억 게이트): 로컬 푸드의 천국. 매일 밤 야시장이 열리며, 현지인과 장기 체류자들이 주로 찾음, 특히 서양 여행자가 많고,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구역
동문(타패 게이트): 관광의 중심지. 송크란 물싸움의 격전지이기도 하며, 호텔, 마사지숍, 여행사, 카페가 몰려 있음, 언제나 북적임.
서문(수안 독 게이트): 비교적 조용한 지역. 치앙마이 대학교 근처로 젊은 현지인들이 많이 보이며, 관광객은 상대적으로 적음, 생활 밀착형 로컬 사원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음
남문(치앙마이 게이트): 가장 생활감이 진한 구역. 아침에는 시장, 저녁엔 포장마차 거리로 변신하며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음
저는 숙소를 님만해민(Nimmanhaemin) 쪽에 잡았습니다. 올드타운 서쪽 외곽에 자리한 신흥 상권으로, 카페와 로스터리, 편집숍, 아트 스페이스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입니다. 단기 여행자보다는 디지털 노마드나 장기 체류자가 많은 편이고, 거리 분위기 자체도 무척 여유롭습니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느긋한 속도가 어울리는 동네였습니다.
도시 외곽으로 시선을 옮기면 도이수텝(Doi Suthep)이 눈에 들어옵니다. 치앙마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산 위의 사원인데요, 해발 1,000m가 넘는 그곳에 올라서면 치앙마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작고 조용한지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황금빛 탑과 바람소리, 그리고 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풍경은 이 도시가 가진 고요함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이번 일정에서는 결국 도이수텝에 가지 못했습니다. 축제를 중심으로 시간을 배분하다 보니, 산을 오르기엔 체력도 시간도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치앙마이를 ‘조금 더 안다’고 말하고 싶다면, 아마 그 꼭대기까지는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면, 일정을 조금 비워서라도 꼭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여행이란 늘 무언가를 놓치게 마련이고, 그 놓친 것들이 다시 이곳을 찾게 되는 이유가 되어 주곤 합니다.
남국의 정취, 기분 좋은 시작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올드타운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치앙마이는 분명 매력적인 도시지만, 동남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처럼 보행자 중심의 구조는 아닙니다. 좁은 인도와 뜨거운 아스팔트, 그리고 오토바이와 차량이 함께 얽힌 거리. 그 사이를 걸으며 약간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아직 이른 아침이었기에 다행히 더위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아침 공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남국의 냄새였습니다. 뜨거운 공기 속에 섞여 있는 익숙하지 않은 식물의 향, 숙소 근처 카페에서 풍겨오는 커피 냄새, 그리고 골목을 걷다 문득 마주치는 이름 모를 꽃들의 향기까지. 그 모든 것이 이른 아침의 치앙마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느 골목을 지나던 중, 오토바이들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풀썩 퍼진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 덥고 게으른 이 도시의 리듬을 그대로 닮은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고양이를 한참 바라보다 보니, 이상하게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 이 도시에서는 시간이 조금 더 느리게 흐르는구나.’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 같았습니다.
아직 이 도시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닌데, 벌써 마음 한편에 정서가 하나 생긴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시작이라면, 뭔가 괜찮은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치앙마이, 사원 너머의 이야기들
조용한 올드타운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치앙마이의 숨결이 조금씩 느껴집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는 왓 프라싱(Wat Phra Singh)이었습니다. 이곳은 치앙마이에서 가장 중요한 사원 중 하나이자, 14세기 중반 란나 왕조 시절에 세워진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이 사원은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북부 태국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보호자’와 같은 상징이며, 태국 전역에서도 가장 정교한 란나 양식의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입구부터 섬세하게 새겨진 목조 장식들, 전통 문양으로 둘러싸인 회랑, 그리고 중심 법당의 고요한 분위기까지—그 모든 요소들이 이곳이 지닌 의미를 조용히 설명해 주는 듯했습니다.
사원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황금 불탑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사되며, 마치 하늘을 찢을 듯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서 있는 순간, ‘아름답다’는 감정보다는 오히려 ‘압도된다’는 느낌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태국이 왜 ‘관광대국’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지, 이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습니다. 이 공간은 단지 보기 좋게 꾸며놓은 것이 아니라, 삶과 종교가 맞닿아 있는 태국인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풍경이었습니다.
법당 옆 정자에서는 스님들이 단체로 예불을 드리고 계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출도, 의식도 아닌 그분들의 평범한 아침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은은한 향 냄새가 퍼져 나왔고, 스님들의 기도 소리는 바람을 타고 조용히 멀리 퍼졌습니다. 이곳에서는 불교가 단순한 종교라기보다 삶 그 자체처럼 느껴졌습니다. 기도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일상이었고, 절은 그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처럼 흘러가는 장소였습니다.
다음으로 발걸음이 닿은 곳은 왓 쩨디루앙(Wat Chedi Luang)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길에 멀리서 보이는 탑의 무너진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마음이 자꾸 걸렸습니다.이곳은 15세기 초, 치앙마이의 전성기를 대표하던 왕 샌 무앙마가 아버지를 위해 세운 불탑에서 시작된 사원입니다. 한때는 높이가 80미터를 넘으며 도시의 중심을 이루던 거대한 구조물이었지만, 1545년 대지진으로 상단부가 무너졌고 지금은 그 위용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무너진 탑 앞에 조용히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형태보다 감정이 더 오래 남는다는 말이 실감났고, 사진 한 장을 찍는다는 건 결국 그 순간의 감정을 저장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왓 씨수판(Wat Sri Suphan)이었습니다. 사원을 처음 마주한 순간,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체가 은으로 이루어진 이 사원은 방콕에서도 본 적 없는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기와, 기둥, 계단까지 모든 부분이 은빛으로 반짝였고, 햇빛을 받을 때마다 건축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곳은 16세기에 세워졌고, 은세공 장인 마을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발전해 온 사원입니다. 내부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세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사원 곳곳에는 태국 신화와 불교 상징, 왕실 문양이 은판 위에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구에는 ‘Man Only’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불교의 계율상 여성의 출입을 제한한다는 안내가 적혀 있었고, 이는 우보솟(Ubosot)이라 불리는 승려들의 신성한 공간에 여성이 들어올 경우 그 청정성이 손상된다고 보는 오래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전통의 뿌리를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신성함’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긋는 그 문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마음 한켠이 불편해졌습니다. 아름다움과 경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 공간 앞에서 저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치앙마이의 사원들은 단순한 관광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 도시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종교가 삶 깊숙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저는 제 여행의 감정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화려함과 고요함, 믿음과 모순, 감탄과 의문. 이 사원들은 치앙마이의 정신이 머무는 곳이자, 여행자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어떤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끼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 대개 계획 밖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왓 씨수판으로 향하던 길, 치앙마이 게이트를 지나 걷다가 우연히 한 국숫집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허름한 파란 천막 아래, 안쪽까지 사람들로 가득 찬 모습. 분위기만으로도 ‘여긴 분명 맛집이다’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때는 목적지가 있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국숫집은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고, 결국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뗑룽르앙 국숫집이었습니다.
세 시간 가까이 땡볕 아래를 걸은 후였기에, 이 집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게 만든 마지막 포인트는 바로 맥주였습니다. 구글 메뉴에는 맥주에 대한 정보가 없었지만, 그냥 부딪혀보자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맥주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점원이 주인에게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고, 어디선가 급히 가져오는 듯한 분위기였지만 그건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맥주는 시원하지 않았고, 저희는 얼음을 따로 요청했습니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조합을 경험해 본 적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늘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동남아에서는 맥주에 얼음을 넣는 조합이 그 자체로 완성된 듯한 만족감을 줍니다. 더위, 습기, 갈증, 피로—이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만 가능한 맛이었습니다. 이 집의 대표 메뉴는 까오소이(Khao Soi)입니다. ‘까오(Khao)’는 쌀, ‘소이(Soi)’는 자르다 혹은 가늘게 뽑다라는 뜻으로, 쌀국수를 진한 커리 국물에 넣어 만든 태국 북부의 전통 요리입니다. 부드러운 면과 바삭하게 튀긴 면이 함께 들어 있어 식감이 재미있고, 향신료와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 노란 커리 국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오히려 우육면이었습니다. 맑고 깊은 국물에 부드러운 고기가 잘 어우러져 있었고,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둘이서 국수 세 그릇과 맥주 두 병을 주문했고, 계산은 310바트가 나왔습니다. 치앙마이에서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한 끼였습니다. 참고로 양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맥주 없이 식사만 하신다면 1인당 두 그릇 정도는 드셔야 든든할 것 같습니다. 왓 씨수판 근처를 지나신다면, 충분히 한 번 들러볼 만한 곳입니다.
치앙마이 탐방 일정을 마무리하며 &송크란 준비
국숫집을 나와 마야몰로 향했습니다. 그랩을 타고 도착한 마야몰 주변과 님만해민 거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곧 시작될 물의 전쟁을 앞두고 거리 곳곳에는 행사 시설이 설치되고 있었고, 노점상들은 저마다 화려한 물총을 진열해 놓은 채 손님을 맞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전야제를 앞두고 마야몰에서 급히 물총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런데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현지에서 물총을 산다는 건 곧 자본주의로 무장한 베테랑들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전력으로 전장에 뛰어든다는 뜻이었습니다. “내년에는 꼭 한국에서 챙겨 오자”는 다짐은 매번 반복되지만, 결국 이렇게 또 시작되는 거죠. 물총을 손에 들고 님만해민 거리를 따라 숙소로 걸어가는 길. 이 동네가 요즘 치앙마이에서 가장 ‘핫’하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카페, 편집숍, 갤러리 같은 공간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고, 거리 전체가 하나의 콘텐츠처럼 구성돼 있었습니다. 왜 한국 여행자들이 이 동네를 좋아하는지, 직접 걸어보니 단번에 이해가 되더군요. 별다른 목적 없이 걷기만 해도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치앙마이에서의 첫날이 저물어 갔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송크란입니다. 몸도, 마음도 젖을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세줄 요약
✈️ “여행은 계획대로 안 된다더니... 항공사가 내 일정부터 바꿔줌^^”
� “사원에서 감탄하고, 골목에서 고양이에게 인생 배움... 국수 한 그릇에 마음 뺏김”
� “물총 하나 들고 출격 준비 완료! 내일은 젖는 게 국룰인 송크란 전쟁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