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울컥하게 만든 뜻밖의 이별 방법
아이를 아무 생각없이 아이라 부르지만
아이가 더 어른이고 어른이 더 아이인 날들이 있다.
그래서 아이를 마냥 아이라 부를 수 없고
나는 진짜 어른인가 생각해보게 하는 경험
육아가 던지는 물음표다.
필자에게는 그 흔한 엄마찬스가 없다.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타지로 같이 오느라
양가 부모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첫째는 친정에서 몇년 함께 살면서 할머니의 온기를 느꼈다.
하지만 둘째는 산후조리 보름 후 바로 친정을 떠나왔고 조부모님을 오래 만난 적이 없어 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피부로 맞댄 세월이 없었다. 둘째의 어깨가 유독 짠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따금 한번 연례 행사로 할머니들이 손자들을 보러 오시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아이들에겐 할매 할배를 만날 딱 1박 2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목욕하다가 할머니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자 둘째는 얼른 만나러 나가겠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방방 뛰면서 좋아하고 할머니 옆에 아기새처럼 졸졸 따라다니는가 하면 마음이 들떠 자정이 지나도 잠에 들지 못했다.
아이에게 시간은 왜 이리 야속한지, 쏜살같이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는 이제 가셔야 해“라고 다음날 오후 3살 둘째에게 작별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아예 못알아듣거나 울거나 가지 말라고 떼를 쓸 나이다.
다음에 또 언제 만날지 예고가 없는 할머니의 작별인사, 아이의 뜻밖의 반응은 눈시울을 붉혔다. 3살 꼬마아이는 할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한 30초 동안을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서있었다. 우두커니 할머니 눈을 바라본다. 내가 울어도 할머니는 가셔야하고 가실걸 알기 때문에 아기처럼 굴거나 붙잡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그리고는 방에 있는 가방을 가져나와 문 앞에 내려놓는다. 나도 어머니도 어른보다 더 어른스런 아이의 모습에 눈물이 울컥 났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과의 작별은 어른에게도 힘들다. 천리만큼 달아나는 시계침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른다. 3살 아기는 아직 시계를 볼 줄 모른다. 갑자기 불쑥 찾아오는 불같은 만남의 설렘, 얼음같은 작별을 받아들이는 넉넉함이 3살에게 있었다.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보내야 함을 알고 잘 보내줄 수 있는 지혜를 나는 가졌는가?
심리학자 피아제는 만남과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대상영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외부 대상이나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대상영속성이다. 이에따르면 만 18개월부터 24개월 무렵은 이중 표상적 사고의 시기로 눈 앞에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실제로 엄마가 계속 존재함을 알고 기다린다. 갓 두돌을 넘긴 아기가 갖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는 나름 심오했다.
불안해하지 말 것, 다시 오겠다는 누군가를 믿고 기다리는 안정적 애착, 어린이 뿐 아니라 알고보면 어른에게도 결정적인 마음의 태도이다. 아이보다 불안한 어른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는가, 나는 오늘 아이에게서 ‘안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