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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닝뽀유 Mar 29. 2023

뭔가를 제일 싫어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

숙제의 역설

육아 중 떠오르는 소소한 기쁨과 커다란 분노의 순간은 찰나에 스쳐 지나간다.​


나는 알았다. 비로소 아이를 낳고 기르고서야 나의 적성이 가르치는 일이 아닐 수도 있음을.

나는 알았다. 어느 한 사람을 향한 절절한 사랑과 처절한 미움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뒤바뀔 수 있음을

그리고 나는 알았다. 어떤 일을 정말 싫어하게 만드는 방법이 숙제라는 사실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에 이르는 순간은 최후의 순간까지 미뤄뒀다 마지못해 하는 숙제라는 사실을. 육체피로까지 겹치면 증오는 극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은 아들의 독서기록장 숙제에서 시작되었다. 독서기록장은 다행스럽게도 학교에서 내어주는

단 한 가지 숙제이다. 담임선생님의 센스에 감동한 건 월요일도 금요일도 아닌 숙제 검사일을 수요일이라는 것! ​


아이유의 노랫말에는 이번주 금요일 어떠냐고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이제 엄마가 되니 그런 것은 두뇌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요일을 되뇌는 것은 숙제 전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월요일 검사는 주말을 불안하게 하기 때문에 안되고 화목은 어정쩡하고 금요일 검사는 황금연휴가 끼어있기 때문에 못할 가능성이 꽤 높다. 주말 동안 못했어도 월요일은 피곤하기 때문에 봐주더라도 수요일은 핑곗거리가 참 없다. 그래서 숙제 검사일 왕중왕은 수요일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큰 배려도 우리에게 심적 위안은 되었을지언정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진 못했다. 결국 숙제 검사 전날 번갯불에 콩 굽듯 해치우기 때문이다.

2쪽짜리 숙제를 하는 데 어르고 달래느라 1시간이 걸렸다. 화내다가 웃다가 흡사 연인같이 숙제를 사이에 두고 난리부르스를 추던 아들과 나, 창의를 요하는 마지막 2문제에서 나는 참을성의 바닥을 보이며 남편에게 토스했다. 밤 11시 아들의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다..그럴 만도 했다. 아침 7시에 기상해 방과후수업까지 마치고 줄넘기수업에 피아노/바이올린 콩쿨 대비 레슨, 집에 와서 자발적 영어독서에 영상시청까지 초2 아들의 하루는 참 길었다. 모두 좋아서 스스로 택한 여정이었지만 어른이었어도 기진맥진할 스케줄이었음을 이해한다. 어른이었다면 씹어먹을 우루사라도 있겠지만 아이에겐 오직 잠만이 유일한 해결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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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학을 머리로 배웠을 뿐 가슴으로 체득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교육의 1과도 관련 없는 남편은 아이와 시시덕 웃으며 가뿐히 숙제를 끝낸다. 게임의 마지막판 몬스터를 거의 무찌르다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구경꾼이 스리슬쩍 휘두른 칼에 몬스터를 잡는 상황이랄까. 남편이 남자라 아들을 잘 컨트롤하는 건지, 나의 수양이 부족한 것인지 미스터리 한 밤이다.

그런데 더 명확한 배움의 순간은 숙제 후에 일어났다. 잠이 와서 숙제를 도저히 못하겠다는 아들이 숙제가 끝나자 말똥말똥한 눈을 반짝이더니 책을 읽어달라며 책을 내민다. 숙제가 싫은 건지 책이 좋은 건지 물어봤다.




자유의지
결국 진정한 공부는 자유의지에서 비롯된다. 대학시절 내가 좋아하던 카페의 이름이 ‘공부의 즐거움’이었는데 나는 그 진정한 의미를 불혹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학교를 떠나 시험을 떠나 직장을 떠나 내가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었다. 독서가 이렇게 행복한 축복임을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하는 대신, 오늘 아이와 책 한 줄이라도 더 많이 읽으며 공부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로 했다.


강제숙제는 독이다.
자유독서는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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