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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닝뽀유 May 26. 2023

Ai가 노래부르는 시대, 영어를 배운다는 건

확신 대신 고심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그날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벌써 알파고 대란이 일어난지 7년이 되었다. 


알파고가 인간 대표를 가뿐히 이긴 그 시점, 나는 놀랐지만, 한편으로 안심했다. 







인공지능? 그래 놀랍긴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 생각했다. 종종 웃음을 터지게 하는 번역기의 우스꽝스런 성능 때문이었다. 2016년 당시 중학교 영어교실을 들여다보자. 일부 아이들은 수행평가나 과제에서 번역기를 심심치 않게 사용했다. 골치 아픈 숙제를 빠르게 끝내주는 개운함을 원했을 것이다. 번역기로 만든 문장은 너무 조잡해서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학생들에게 "암암, 번역기를 쓰셨군요!"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나는 말했다. "나는 너희들의 실수를 원한다. 무한한 실수만이 바른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내용 전달을 목표에 두고, 문법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도록 하자."


번역기를 쓴 문장은 너무도 오류가 많을 뿐 아니라, 웃음이 나오게 하는 수준이었다. 


알파고 사태 3년이 지난 후, 이세돌은 은퇴했다. 그의 은퇴에 인공지능과 시대적 대결이 한몫 했으리라 본다. 2023년 현재, 번역기의 성능을 보며 나는 혀를 내두른다. 

이제 영어과제에서 번역기를 사용하거나, 다른 교과 과제에서 챗GPT를 사용한다하더라도 알아챌 수 없을만큼, 오히려 유식함을 자랑하는 지식인이 쓴 글보다 더 뛰어나다 할 수 있을만큼 번역기는 거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복사+붙여넣기로 챗 GPT에 어떤 코드를 입력하고, "이해했니?"하고 물어본다. 1분도 채 안되어 학습했다는 응답을 보여준 챗 GPT,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꾼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원하는 패턴의 그림까지 만들어내고, 음악을 작곡하고, 동화책을 쓰기도 한다. 오늘은 뉴진스의 노래 Hype boy를 브루노마스가 제법 괜찮은 한국어로 부르는 커버 곡이 유튜브를 달군다.

WhoAmI, AiCover 채널 

얼마 전 잠들기 전에 아이와 대화를 나눴다. "엄마는 왜 영어선생님이 됐어?" 하고 묻는 9살의 대답에 난 이렇게 말했다.




푸른 눈동자, 저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과 생각을 나눌 수 있고, 소통한다는 것, 언어는 참 매력적이더라.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지 말을 배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더라. 영어는 세계공용어어니까, 90퍼센트 이상의 텍스트와 말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쥐어준다고 엄마는 생각했어. 단어라는 조각을 사용해서 문법이라는 퍼즐을 맞추면 비밀의 정원에 들어가는 마법의 문을 언어라는 열쇠로 여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 기분은 정말 짜릿하고 신기했어. 너도 그 기분을 꼭 느껴보면 좋겠구나.


졸리운 밤, 아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영어를 처음 배울 때의 행복감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한켠에 말하지 못하는 망설임이 스물스물 기어나왔다. 영어를,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그에 상응한 노력과 스트레스만큼 학습자의 인생툴이 되어줄까, 나는 미래에도 그러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호텔 베란다에 펼쳐진 풍경



사실 과거엔 그러했다. 영어를 모르면 글도 말도 전혀 소통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아니다. 사실 영어에 능숙해도 완벽한 바이링구얼이 아니라면,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영어를 모국어보다 쉽고 빠르게 처리할 수 없기도 하다. 영어 아니라 전혀 낯선 언어로 가득찬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더라도 인공지능이 만든 산물은 상당히 편안한 여행을 돕는 수준에 이르렀다. 스페인 세비야의 어느 골목이었다. 자갈이 울퉁불퉁하게 붙어있는 아주 좁은 거리, 타파스 가게에 와인잔을 들고 있는 인파 속을 헤치고 남편과 나는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벽에 낙서가 잔뜩 써있었는데, 스페인어에 문외한이었던 우리는 필체만 보고도 왠지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지나치려는 찰나, 남편이 휴대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는다. 기록을 위한 사진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인공지능은 사진에 찍힌 텍스트를 모두 분석했고, 즉각 한국어로 뜻을 알려주었다. 짐작했던대로 사랑 고백이 맞았다. 


스페인 어느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



외국의 좁은 길목에서 우리 가족 밖에 익숙한 것이 없을 때, 암호같이 적힌 길거리의 낙서를 보고 웃을 줄 알게 되었고, 표지판을 보고 처음 간 길을 꽤 능숙하게 찾을 수 있었다. 구글지도는 나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몇 미터만 더 가면 내가 온라인으로 예약한 숙소가 나오는지 알려준다. 동물원 티켓부스에서 티켓을 살 때도, 아이의 한국어 농담을 번역기로 실시간으로 듣고 이해한 판매원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언어는 달라도 소통은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여전히 큰 장점과 열쇠를 나에게 쥐어준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이 어눌한 한국어로 도움의 눈빛으로 말을 걸어올 때, 휴대폰 번역기에 의지한 사람보다는 훨씬 더 정이 가는 편이다. 능숙하든 그렇지 않든 같은 언어 코드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진정성이 묻어난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다는 것, 말로서 감정을 교류하기 때문이다. 

스페인 세비야, 결혼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인공지능의 시대, 번역기가 어눌함에서 거의 소통 가능으로 오기까지 7년의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세돌이 바둑에서 은퇴한 것처럼, 한국에서의 외국어 학습 열풍이 사라지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어, 단순히 앵무새처럼 잘 말하는 것보다 이제 그 말을 구성하는 맥락으로 들어가 나만의 텍스트를 만드는 세상 속으로 아이들은 걸어들어가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열어갈 미래에 부모 세대는 어떤 브릿지가 되어줄 수 있을지 생각해보아야겠다


Photo by 햇님부셔

글 by 러닝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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