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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Feb 17. 2023

팀장님의 이 말 한마디에 하얗게 불태웠다.

할 수 있겠어요?

"목요일까지 할 수 있겠어요?"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이번 주 월요일 아침. 사무실에 앉아 일을 시작하려는데 내 자리 뒤에서 스산한 기운이 스쳤다. 팀장님이었다. 인사처럼 넌지시 내게 할 수 있겠냐는 물음을 던지셨다. 난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어 어버버 답도 못했다. 그 건 있잖아요. 설계 건. 얼타는 내게 팀장님은 친절하게 언질을 주셨다. 그제야 난 이해하고서 버벅거리며 해보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얼버무리며 한 대답은 내가 들어도 참 못 미더웠다. 훅 들어온 팀장님의 월요일 안부인사가 스팀팩이라도 됐을까. 4일간 매달린 끝에 어찌어찌 목요일 퇴근 시간을 앞두고서 설계를 끝마쳤다.  

GO GO GO!

내가 쳐낸(?) 업무는 얼마 전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고서 인계인수받은 공사 건이다. 전임자가 작성한 인계인수서에는 여유 있게 설계를 진행해도 되는 것처럼 쓰여 있었다. 하지만 2월 초에 상황이 급변했다. 공사와 관련된 공장 쪽에서 빠른 진행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왔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자료를 뒤져보니 업무가 계류 중이었고 딜레이가 됐다는 걸 알게 됐다. 뭐 하나 제대로 익힐 틈도 없이 팀장님과 공사 건을 같이 살펴보며 업무계획을 수립했다. 적어도 이번달 내에는 '무조건' 설계를 마치고 입찰 전 단계까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원래대로라면 2월 내까지만 하면 되는 것이라 타이트하진 않았다. 아내의 출산이 임박해지며 긴박하게 변했다. 출산 후 입원기간 동안 배우자 출산휴가를 써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때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오늘 잡혀있던 진료 때 출산일을 결정할 수도 있어서 어제(목요일)까진 '무조건' 끝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오기였을까. 팀장님께 대답은 시원찮게 했지만, 주어진 데드라인 안에는 어떻게든 해내고 아기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설계서 초안부터 시행 품의 작성까지 할 일 목록을 추리고서 하나하나 쳐내갔다. 불요불급한 업무는 다른 팀원들과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배분했다. 간간이 들어오는 민원전화와 업무문의도 최소화했다. 점심에도 밥을 먹고 불 꺼진 사무실에서 일을 봤다. 저녁에는 정말 오랜만에 자발적 야근을 했다. 퇴근해서도 원격시스템으로 재택근무를 했다. 공기업이라 수당도 안 주는데 무슨 추가근무를 하냐는 사뭇 MZ세대의 사고를 갖고 있던 내가 놀랍게도 자발적 추가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월요일 아침만 해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날 짓눌렀으나, 수요일쯤 됐을 땐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팽배해졌다. 데드라인의 위대함은 생각 이상이었다. 4일이라는 물리적 시간 안에는 설계서의 디테일한 내용까지 100% 검토할 수는 없었다. 하나하나 신경 쓰다간 절대로 해낼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일단 결과물을 만들어야겠다를 최우선순위로 두었다. 설계를 완료하고, 엉성하고 모자란 부분은 나중에 메꾸면 된다는 합리적 방어기제를 켜둔 채 일에 매달렸다.


목요일 오후, 설계의 마무리 단계인 설계심의 서면결재를 위해 인근 사업소로 향했다. 왕복 1시간 거리라서 사무실 근처 스벅에서 아아를 투고해서 출발했다. 어느 때보다 카페인이 내 몸 세포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결재를 받고 개선장군처럼 사무실에 돌아왔다. 결재본을 스캔한 뒤 팀장님께 당당히 휴가 결재를 올렸다.


오늘은 홀가분하게 쓴 휴가를 이용해 아내의 산부인과 진료를 동행했다. 잘하면 이번주 주말에 유도분만을 잡을 수 있을 거란 아내의 말과 달리 의사 선생님은 일주일 후를 얘기하셨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김이 샜지만, 오늘 휴가를 내지 않았다면 꽤나 피곤했을 법했다. 4일 동안 쌓인 여독 때문인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몽롱하다.


팀장님의 '할 수 있겠어요?'라는 한 마디 덕분에, 나는 내가 그래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던 한 주였다. 팔뚝에 꽂았던 스팀팩은 이제 뽑고서 맘 편히 아기를 만날 날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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