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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맛있는독서 Nov 28. 2023

13. 내면과 존재의 결속, 당신은 당신이 잘 보이나요

_<시와 산책> 한정원

     

‘변용’이라는 딱딱한 어휘에는 번역자의 주석이 달려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옮기는 것.” 바로 저녁이 하는 일, 저녁에 벌어지는 일이다.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p.125)     


 <시와 산책(시간의 흐름), 2023>의 작가 한정원은, '나'는 ‘내면’과 ‘존재’로 구분되어 있다고 표현합니다. 눈에 보이는 실체인 '나'라는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내면에 의해 나타난다, 혹은 드러난다고 인식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글에서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p.25)고 말합니다. 부드러운 문장임에도 자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얼마 전, 작가 한정원을 공주에 있는 ‘미정 작업실’이라는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문장에서 주는 느낌처럼 매우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사와 상관없는 듯한 맑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곤조곤 자신의 글을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야무지고 단단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약해 보이지만 강하다. 잔잔하지만 강렬하다. 분명 어울리지 않는 듯한 단어들이지만 딱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는 혼자 살고 싶어서 혼자 살았다. 바깥세상에 나가봤는데 별 마음을 끄는 게 없길래 은둔했고, 흰옷을 입은 자신이 가장 멋져 보이길래 흰옷만 입었다. 그것뿐이다.
(p.101)     

 <시와 산책>에서 그녀가 에밀리 디킨슨을 표현한 이 문장은, 마치 작가 한정원이 자신 또한 ‘나도 그러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 한정원은 <시와 산책>으로 데뷔하였습니다. 출판사 시간의 흐름에서 ‘말들의 흐름’ 시리즈로 기획한 총 10권 중에 4번째 작품입니다. 작가 한정원의 첫 책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p.25)고 고백하는 작가. ‘문창과’ 출신이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작가지만 그녀의 첫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되더군요. 2023년 그녀는 총 28개의 막으로 이루어진 제목 없는 시들을 담아 <사랑하는 소년이 얼음 밑에 살아서>를 출간하며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나이 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는 작가 한정원의 다음 작품엔 어떤 글들이 어떤 형식으로 모여 담기게 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껏 기대하게 됩니다.     


 글은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간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상 깊었던 문장이 또 다른 이에게는 그저 그런 느낌으로 와닿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자와 독자의 지향하는 무엇인가가 레이더에 포착되는 것처럼 맞닿아야 공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시들을 소재로 산책하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 <시와 산책>. 산책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성찰하는 시간으로 본 작가의 글이기에 그 주파수에서 벗어난 누군가에게는 난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낯설다고 느껴진 독자가 있다면 한낮 햇살 퍼지는 공원 벤치에서 한정원의 글을 음미해 보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가끔 삶에 대한 불안으로 허공에 뜬 듯한 느낌이 들 때 “우리가 두려운 것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p.46)라는 작가의 말이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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