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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롱말 Sep 19. 2023

오타쿠로서의 개인적 자아 경험과 정체성 형성의 과정

글: 진타(조롱말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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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ke Up, Girls!>


 최근 몇 년 동안, '오타쿠'는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게임에서부터 웹툰과 케이팝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로의 외형을 무섭게 확장하고 있다. 지난 세대에서 '오타쿠'는 성적인 측면이 과잉되게 비틀리고, 반사회적인 성격유형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국내의 반일 정서와 결합하여 오타쿠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오타쿠 집단 내부에서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숨덕(숨어서 덕질하는 덕후)' 등의 용어가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되었을 정도로 부정적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비춰지는 오타쿠의 취급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비록 '씹덕'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오히려 역으로 이를 개성 삼아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곳곳에서 발견된 것이다.그렇다면 기존의 대중문화에 대치하며 하위에 머물러 있었던 오타쿠는 오늘날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일까. 인터넷이 보편적인 미디어가 된 조건 속에서 오타쿠를 향한 사회적 인식과 정체성 형성 과정이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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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쿠를 향한 반감정서는 80년대 발생한 도쿄·사이타마 연쇄 유아 납치 살해 사건(東京・埼玉連続幼女誘拐殺人事件), 일명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미야자키의 범행은 보도 과정에서 호러 영화와 여아를 대상으로 한 상업지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타쿠'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화성인 바이러스' 44화 십덕후편


오덕페이트: "페이트랑 결혼해서 신혼여행 가고 싶어요."

지나가던 사람들: "뭐야 저거? 변태 같은데?"


 국내의 경우, 일본의 대중매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 각종 매체에서 오타쿠를 자처하는 인물이 하나둘 등장하면서 '오타쿠'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널리 각인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화성인 바이러스>의 게스트로 출연한 '오덕페이트'는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의 등장인물 '페이트 테스타로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며 소위 '튀는 행동'에 대한 관용이 낮았던 당시 사회 정서와 충돌하며 큰 혼란을 낳았다. 

이와 더불어 일본이 경제불황을 겪으면서 나타난 히키코모리와 니트족에 대한 사회문제가 결합하여 오타쿠란 '비활동적이고, 사회성이 없으며,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오타쿠'는 마니아적 성격을 띠는 단어이기보다 비정상적인 범주를 지칭하는 일종의 멸칭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그에 따라 오타쿠 집단에 속한 이가 오타쿠임을 거부하거나 숨겨야 하는 '일코' 문화가 발생했다.


 '일코'란 '일반인 코스프레'의 준말로, 오타쿠가 아닌 '일반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용어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타쿠' 정체성은 가급적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오타쿠가 '일반적이지 않음'을 전제한다. 오늘날, 이 같은 흐름은 현실에서 쉬이 만날 수 없는 '같은 오타쿠'와의 소통 욕구 해소를 위하여 활동 기반을 온라인으로 옮기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좋아하는 작품 혹은 장르를 기준으로 조직적인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타입의 오타쿠인지 드러내는 행동 양식을 취한다. 해당 과정은 오타쿠로서의 세계를 구성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보하는 작업으로 기능하며, 취향 및 코드가 맞는 이를 쉽게 찾고,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 즉,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던 사회에서 벗어나 인터넷이라는 자신만의 해방된 공간에서 원하는 형태로 정체성을 형성하고, 욕구에 따라 스스로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이들이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오타쿠 집단 내부에서도 '일반인-비 오타쿠-다운 모습을 밝혀야만 하는' 강박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로, 자신은 유명 플랫폼에서 옷을 구매하며, 이성 친구가 있다는 것을 과시적으로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식이다. 이 같은 현상은 오타쿠 집단이 미디어를 통하여 서로를 지속적으로 구성하고 지탱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비하하고 학대하는 불일치의 상황을 자아낸다. 이러한 양상은 자신과 타인의 연대감으로 이어지며 공동체를 공고히 하는 양분이 되기도 하나, 공동체 전체에 무력감을 키우며 모순된 정체성의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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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제이팝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한국에서 일본 제품을 불매하자는 '노 재팬'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대중문화 분야를 매개 삼아 한일 간의 교류와 호감이 지속적으로 높아진 결과,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가 국내 기대작을 연이어 제치며 장기 흥행하는 기록을 낳기도 했다. 동시에 1인 미디어 플랫폼의 급격한 부상은 하위에 머물러 있었던 일본 문화를 수면 위로 끌어내어 주류문화와 합병시키는 역할을 도맡으며 서브컬처와 하이컬처의 위계를 불분명한 것으로 전환해 놓았다. 오늘날 신세대들이 취향과 취미를 중요시하며 소셜 미디어 내에서 취향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경향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맥락이 오타쿠에 대한 인식을 완화하긴 하였으나, 기존의 프레임을 기반으로 한 '독특하고 비범한 괴짜의 이미지'로 변모하면서 오타쿠가 일종의 스타일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오타쿠에 대한 여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서 유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현대사회 청년들의 '비주류를 자처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으로는 앞서 이야기했던 1인 미디어 플랫폼과 취향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SNS의 급격한 부상은 삶이 전시해야만 충족되는 무엇이 되게 하였으며, 시대적으로 강화된 개인주의는 자기실현과 자기 발견의 가치를 명목으로 '너만의 어떤 것을 하라'는 식의 경쟁을 유발한다.  때문에 기존의 오타쿠들이 작품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식의 '덕질'을 했다면, 오늘날의 오타쿠들은 자신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취향을 수집하는 식의 '덕질'을 한다는 점에서 크게 구분된다. 예컨대, 오타쿠 문화에 친화적이지 않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나란 무언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오타쿠로 대표하는 식이다. 


한편, 오늘날 인터넷의 발달이 오타쿠 문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는 하였으나 '숨덕'이나 '일코' 문화가 사라지기는커녕,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등지에서 '덕질'에 대한 일종의 희화화가 놀이로서 밈(meme)화 되며 '오타쿠는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숨겨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조장하는 명분이 되었다. 현대 사회는 오타쿠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타쿠들은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는 독특한, 이상한 괴짜'의 극단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타쿠란 단순히 오타쿠 스스로가 자신을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 아닌, 현대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혼재된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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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오타쿠에 대한 인식이 어떤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는지 그 경위에 대해 돌아보았다.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1980년대 '연쇄 유아 납치 살해 사건'으로 시작된 부정적인 인식이 오타쿠를 향한 특정한 이미지를 형성하였고, 이들의 집단 내부에는 '일코'나 '숨덕'이라는 문화가 발생함으로 인하여 모순된 오타쿠 정체성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오늘날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오타쿠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긍정적으로 전환되었으나, 이들의 이미지가 웃음거리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여전히 복잡성이 내재된 정체성으로 남아있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오타쿠의 이런 특징들을 염두에 둘 때, 오늘날 자신을 오타쿠라 이름 붙이는 행위는 자신을 '제시'하는 동시에 내부 집단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연극적인 자아 연출'의 측면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오타쿠란 오타쿠라는 범주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을 수행하며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구성하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국내 서브컬쳐 공동체 내의 오타쿠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초연결사회가 만들어 낸 '뉴타입'의 사회, 문화적 현상을 논하는 데도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참고자료

1.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2. <화성인 바이러스> 44화 십덕후편

3. 자아 연출의 사회학(어빙 고프만)

4. Wikipedia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

5. 유사첩. "서브컬처의 권력구조에 관한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호서대학교 대학원, 2020. 충청남도

6. 문화과학 2022년 여름호 (통권 제110호) 바깥이 없으면 어디로 나가지? : 동시대 웹 문화에서 서브컬처의 위상 변화

7. 서울신문 '日애니의 질주...역대1위 ‘슬램덩크’에 ‘귀멸’ ·‘스즈메’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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