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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승호 Mar 25. 2024

아이들에게 실패할 기회를

 명절 전날 밤에 아홉 명의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부모님을 찾아왔다가 의기투합한 모양인데,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직장인이 되었고 두 명은 결혼도 하였지만 제 앞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이었습니다. 옛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던 중, 한 제자가 웃으면서 학창 시절 저의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비리가 있을 수 없다는 자신감 뒤로 불안이 살짝 찾아왔는데 체육대회 때의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체육대회 농구 경기에서 자기가 열심히 뛰고 있는데 선생인 제가 힘들지 않느냐고 묻더랍니다. 우리 반이 이기고 있었고 본인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있었으며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기에 괜찮다고 답했음에도 재차 묻더니 결국 자기에게 나오라고 했답니다. 그러고는 선생인 제가 들어가 선수로 뛰었는데 실수를 연발하고 슛도 모두 실패해서 결국 우리 반이 패배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 기억 어느 곳에도 없는 사건이 그 제자에게는 아픈 기억으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젊은 시절 학교 체육대회 때 아이들과 함께 뛴 적이 몇 번 있는데,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선생인 내가 뛰게 되면 한 명의 학생이 뛸 기회를 잃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이후에는 뛰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습니다.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아픔도 모두 아이들의 몫이고, 웃고 울고 다투고 용서하면서 배우고 성장해야 할 대상도 아이들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요. 

 제가 몸담았던 학교에서는 오래전부터 체육대회도 축제도 아이들이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그래도 문제가 일어나기는커녕 모두 신나고 재미있는 한마당을 훌륭하게 만들어 내곤 합니다. 학생들끼리 심판을 보게 하여도 다툼 없이 경기를 마무리하고, 기획에서 연출까지 모두 맡겨도 축제는 신명이 넘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스스로 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성장해 가도록 기다리고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임을 시간이 흐를수록 절실히 느꼈습니다. 

 요즘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기회를 빼앗는 일’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중학생 고등학생 자녀들을 아직 어리다 여기고 혼자 할 수 없다 말하면서 판단도 행동도 대신해 줍니다. 아이들 스스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여 대신 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아이들이 하면 망칠 것이라 걱정하면서, 아이들이 누려야 할 성취감과 자신감뿐 아니라 능력까지도 빼앗아 버립니다. 바보 만드는 일임을 알지 못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리고 있습니다. 아들딸이 해야 할 아주 사소한 일까지 챙겨 주면서 스스로 훌륭한 부모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중고등학생 때 심부름 한 번 시키지 않고 대학생이 되어도 스스로 옷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작은 일 하나 처리하는 것도 버거워하고 사소한 선택을 할 때조차 엄마를 찾는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일까요? 

 누에고치에서 나방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던 어떤 사람이 안쓰러운 마음에 가위로 고치의 구멍을 키워 주었답니다. 덕분에 나방은 수월하게 고치에서 나왔겠지요. 하지만 나방은 얼마 날지 못하고 조금 퍼덕거리더니 이내 죽어 버리고 말았답니다. 나방은 고치에서 힘들게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혈액순환이 이루어져 영양분이 온몸에 전달되고 각 신체 부위가 단단해지는데, 그런 과정 없이 넓은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왔으니 제대로 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자는 자기 새끼를 일부러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린다는 이야기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새끼 스스로 올라오도록 훈련시키고 혼자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도록 단련시켜서 강한 사자로 키우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고통을 견뎌 낼 힘을 키우지 못하면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정글에서 맹수의 왕으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자녀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의 기쁨을 맛보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특히 아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지식 전달만이 교육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지식의 중요성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기회를 주는 일 또한 지식 전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고맙겠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특기와 적성을 깨닫고 진지하게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탐색할 기회를 주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니까요.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자질 중 하나가 사람에 대한 이해인데,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어렸을 때 농사일을 도왔던 경험이 농촌과 농민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배고픔의 경험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해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사회에 나아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에는 하기 어려운 다양한 경험을 학창 시절에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꼭 필요한 어른들의 책무랍니다. 다양한 체험은 진로 선택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건전한 인격 함양,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라고 하였습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고, 백 번 보는 것이 한 번 행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이지요. 직접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고 지혜도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친절한 선생이기를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기다려 주는 선생이 더 훌륭한 선생이고, 많이 가르쳐 주기보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잘못과 실수에 대해 야단치기보다 도전했음을 칭찬해 주고, 도전하는 아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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