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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승호 May 19. 2024

인터넷 강의, 도움 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의 별명은 ‘바보상자’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바라보게만 만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바보상자인 텔레비전을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EBS 수능 교육방송에서 수능 문제가 출제된다는 이유로 EBS 수능 강의 시청은 수험생에게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고, 아이들은 바보상자 앞에서 바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매력은 ‘쉽다’는 것입니다. 앉아서든 누워서든 그냥 쳐다만 보면 되니까요.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반응하지 않아도 되며 한눈팔아도 되고 딴생각해도 되며 잠을 자도 괜찮으니까요. 텔레비전은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간섭하지도 않고 귀찮게 하지도 않고 눈치 주지도 않습니다. 보는 내내 아무런 부담이 없

지요. 세상에 이만큼 편한 상대가 있을까 싶습니다. 

 방송국이 많아지고 채널이 다양해져서 텔레비전을 통해 명강사 명교수님들의 강의를 접하곤 합니다. 쉽고도 재미있고 명쾌한 강의에 감탄합니다. 그런데 하루만 지나도 그 내용을 되새기려 하면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열심히 들었음에도 생각나는 것은 단순한 내용 한두 가지뿐이고, 그것마저도 일주일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사고력을 길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라고 외치면서 사고력을 저하시키는 텔레비전을 보라 하는 것, 그것도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보라고 강요하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입니다. 밤에 숙면을 취해야 할 아이들에게 밤늦게까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으라고 강요하는 어리석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훌륭한 강사와 양질의 강의로 가득한 EBS 강의를 열심히 시청하면 실력이 껑충껑충 향상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진 지식이나 지혜가 텔레비전 강의를 통해 얻은 것이냐고요. 강의를 들을 때에는 이해되고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것이 진짜 지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수동적으로 듣기만 해서는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말에 교회에 갔다는 학생을 친구들 앞에 서도록 한 후, 지난 일요일에 목사님께 들은 설교 내용을 이야기해 보라 하였을 때 2분 넘게 이야기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졸지도 장난치지도 않고 열심히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2,3일 전에 들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고, 한 번만 들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이상, 한 번 듣고 그 내용을 누군가에게 

설명해 주기란 어렵습니다. 공부 내용은 더더욱 그렇지요. 결코 쉽거나 간단한 내용이 아니고 재미있는 사건도 아닌데 한 번 들어서 자기 지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정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보충수업 시간에 강의 듣고, 학원 선생님 강의 듣고, 과외 선생님 강의 듣고, EBS 강의 듣고, 인터넷 강의 듣고, 듣고 듣고 또 듣고 듣고…. 도대체 언제 차분하게 앉아서 자기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익히는 시간은 언제 가질 것이며, 생각할 시간은 또 언제 가질 수 있나요? 도대체 아이들의 실력을 향상하자는 것인지 떨어뜨리자는 것인지, 사고력을 기르자는 것인지 죽이자는 것인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관학교에 합격한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사교육은 한 시간도 하지 않았고 자기주도학습만 했던 제자였는데, 사관학교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거두고 있다면서 고등학교 때 자기주도학습을 한 덕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제자뿐 아니라 서울대를 비롯하여 소위 명문대에 진학한 우리 학교 졸업생들의 공통점은 사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고, EBS 방송이나 인터넷 강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학교 수업만으로 ‘배움’은 끝내고 스스로 탐구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점입니다. 

 EBS 강의, 인터넷 강의를 듣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재수생이라면 하루 종일 책만 보는 것이 따분하니 인터넷 강의를 들어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원에 다니는 재수생이나 학교에서 수업받는 학생이라면 ‘배움’은 수업으로 충분합니다.  EBS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사교육과 마찬가지로 자기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EBS 강의 내용이 꼭 필요하다면 방송 교재로 공부하면 됩니다. 수능에 출제되는 것은 EBS 강의가 아니라 EBS 교재에 담긴 내용이니까요. 이제라도 배우는 시간을 학생 스스로가 익히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시간으로 바꾸어주면 좋겠습니다. 

 졸업한 제자들에게 물어보면 탐구 과목, 그러니까 사회·과학 과목은 인터넷 강의의 효과를 조금 보았지만,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국어·영어·수학 과목은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EBS 강의나 인터넷 강의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고, 바보상자인 텔레비전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수학능력시험은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입니다. 바보상자인 텔레비전은 사고력 향상을 방해합니다. 유창한 EBS 강의나 인터넷 강의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제가 만난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학생들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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