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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ca Kim Aug 22. 2020

나는 인복도 많지

할머니가 안내해 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아이들의 할머니는 나의 또 다른 구세주이시다.

열심히 구직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할머니와 함께 동네 마실을 나갔다.

집 근처에 'Saint Ignatius College'라는 사립 남자 중고등학교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멋진 레인코브 강의 조망과 남색 교복을 입은 풋내기 남학생들을 볼 수 있다.  여기저기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운동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나는 이 곳을 때때로 친구들과 아니면 혼자서 찾곤 했는데, 할머니와는 오늘이 처음이다.

가는 도중 우리는 카페를 발견했다. 커피, 각종 음료, 스낵 거리등을 파는 곳이다.

할머니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다 비슷한가 보다.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위풍당당하게 사장 어딨냐고 물어보셨다.


동양인 중년 남자가 나온다. 


'오 쉣 또 한국인 아니야? 제발 아니여라....'


두근두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궁금해졌다. 


중국인이다. 근데 다행인가;;


할머니는 다짜고짜 

" 이 아일 고용해요 "라고 하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할머니 덕분에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니?"


"한국이요!"


"오~ 나도 한국 가본 적 있어. 그런데 어떤 비자를 가지고 있지? 만료는 언제 되고?"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6개월 뒤에 만료됩니다."


"아! 너무 이른데... 내가 널 다 가르치고 나면 너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미안해.. 안 되겠어"


흠... 무리였나 보군. 바로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의지가 소나무처럼 굳은 할머니가 계속 들이댄다.


"사장 양반!!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봐. 애가 참 착하고 일도 잘해. 한 번만 나 믿고 써봐!!"


결국 할머니의 계속되는 성화에 사장이 못 이긴 척 OKAY! 했다. 내일 시험 삼아 2시간 정도 트라이얼을 한번 시켜보겠다고.

내일 오전 8시까지 카페에 오라고 하셨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정확히 3초가 걸렸다. 이 상황을 인지하고 기뻐하기까지..

입이 귀에 걸려 할머니를 와락 안으며 Thank You!!라고 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웃으며, 목적지였던 Saint college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오늘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로 안내해주셨다. 넓은 초록 고원 같은 평화로운 잔디밭을 지나,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을 지나.. 어느덧 우리는 강물이 보이는 곳에 진입했다. 

저 멀리 시드니 시티의 삐죽삐죽 높게 솟은 건물들과 하버브릿지가 보인다. 


나는 주로 내가 아는 길로만 다녔다. 바로 옆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편리성 때문에, 

그리고 다른 길로 갔다가 길을 잃을까 두려워 늘 가던 길로만 갔다.

그런데 오늘 같은 장소에서 조금 다른 길을 택했을 뿐인데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전망이 눈 앞에 펼쳐진다. 

조용한 자연과 어우러진 바쁜 시드니 시티의 예술적인 조화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여태껏 익숙한 것만 고집하다가 바로 옆에 있던 새로운 기회들을 놓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모로 할머니께 감사하다. 이런 괴짜 가족들과 같이 사는 게 보통 힘이 든 게 아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늘 나를 챙겨주시고 힘들 때마다 내 편이 되어 도와주시니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나 혼자의 힘으론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랜 기간 이 동네에 살아오신 터줏대감 할머니가 본인의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해주신 길을 믿고 따라갔더니 기적같은 기회가 생겼다.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뒤돌아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야겠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거기엔 분명히 그 긴 여정 동안 앞에서 나를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또 곁에서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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