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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Feb 16. 2021

캐나다 회사 생존기#11

원하는 게 있다면 말을 하자.



새로운 배경 리드 자리를 얻은 마틴은 바로 그다음 날부터 하루에 몇 번씩 배경 디자이너들의 자리를 돌아다니며 작업이 잘 되고 있냐 , 현재 하는 작업에 대해 조언을 좀 해 주고 싶다면서 본격적으로 영역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을 해 대는 통에 오히려 작업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뭔가 작업이 진행이 돼야 잘 되고 있는지 안되고 있는지 알 게 아니냐 이 녀석아!!! 제발 그만 좀 물어보라고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며 애원하고 싶었다. 아트 디렉터인 안드레도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디자이너들에게 일의 진행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아침 진행 사항을 보고 하고 있었고 디자이너들의 요청이 있을 때 안드레는 작업에 대해 코멘트를 해 줬기 때문에 마틴의 그런 행동이 과하다고 느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채 최대한 웃으며 나는 마틴에게 부탁했다.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내가 너에게 가서 어떤지 물어볼 테니 그전까지는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 좋은 마틴은 고맙게도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럼 물론이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 말고 말해.]
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한숨을 돌리며, 이렇게 대화로 풀면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그까짓 자리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냥 주어진 일만 잘 하자.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나 아닌 마틴이 그 직책을 맡았겠지. 속 좁게 질투 그만하고 프로답게 행동하자고 다짐했다. 

다시 일에 집중하기를 2시간여 정도 지났을 때 마틴은 또 내 자리로 와서 일은 잘 되고 있느냐? 지금까지 작업한 걸 볼 수 있냐고 물었다. 
[2시간 전에 네가 보고 가서 많이 진행되지 않았어.]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알아. 그렇지만 잘 진행이 되고 있는지 보고 싶은데.]
그의 말을 듣고 내 부탁이 씨도 안 먹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틴이 내 자리를 떠나고 나는 안드레를 찾아갔다. 
[안드레, 마틴이 너무 자주 와서 작업을 확인하려는 통에 오히려 방해가 돼서 그러는데 어떻게 생각해? 하루에 4~5번은 너무 심하잖아.]
나의 볼멘소리에 안드레는,
[그래? 그러지 말라고 마틴에게 말해 봐.]
라며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고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벌써 부탁했는데 소용이 없어.]
[다시 얘기해 봐.]
그는 또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 후로 며칠 동안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옥과 같았다. 내 속은 타들어 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상관없이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일을 하는 것을 보는 것도 힘이 들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기대한 걸까?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정처 없이 떠 돌았다.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확! 회사 때려치우고 이 길로 당장 짐 싸서 나가고 싶었지만 얼마 전 집을 장만하면서 작성한 모기지 서류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니다. 극단적인 생각은 잠시 접어 두도록 하자. 그렇게 온갖 불만을 얼굴 가득 티 나게 담고 다녀서 인지 어느 날 줄리엣이 내게 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아니, 괜찮은데. 그래 보여? ]
[네 얼굴에 다 쓰여 있잖아. 그렇게 티 내고 다니는데 모를 수가 있나?]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얼굴에 모든 속마음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줄리엣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회의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줄리엣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리드 프로그래머였기 때문에 이안이 진행하는 리드 회의에 안드레와 함께 참석한다. 그 모임에서 마틴의 이야기가 나왔고 어떻게 그가 리드 자리를 차지했는지에  대해 알려줬다. 
[마틴은 본인이 리드가 되고 싶다고 지속적으로 말을 했어.]
[정말이야? 그러면 그렇게 리드가 되는 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안드레와 마틴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고, 마틴은 안드레에게 지속적으로 리드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싶다고 오랫동안 설득을 한 모양이야. 그걸 안드레가 들어준 거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줄리엣은 그런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리드 자리를 맡고 싶었던 거야?]
[솔직히 나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못했지.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 자리를 맡지 못한 이유가 내 실력이 그 보다 떨어져서였다고 생각했거든. 그런 생각들이 요 근래 나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어.]
[리드가 된다고 실력이 좋다는 걸 의미하진 않아.]
[그래?]
[리드는 좀 더 많은 책임감을 일로서 해야 하는 자리야. 네가 그 자리를 맡지 못했다고 해서 실력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네가 그 자리를 원했다면 너도 말했어야 해.]

줄리엣과의 대화를 마치고 난 후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얌전하게 앉아서 묵묵히 내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남들이 또는 회사가 알아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손안에 쥐어 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내 맘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걸까? 

내가 팀의 리드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내 몫을 요구하지 않아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완벽히 구사하지 못했던 이유가 작용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자리에 부적격하다고 느낄만한 다른 이유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 이후로 같이 일하는 작업자들 그리고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치열하게 자기 홍보를 하고 원하는 것들을 관철시키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날 오후 새 팀으로 일찍 감치 옮겨 간 JS를 찾아갔다.
[네가 새 팀으로 옮기게 된 계기가 누군가 너에게 제안을 했던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한다고 말을 했어?]
[너 인사팀에서 일하는 킴(kim) 알지? 너랑 나랑 같은 팀에서 일을 할 때, 어느 날 커피를 마시려고 카페테리아에 갔는데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요즘 일하는 게 어떻냐, 프로젝트는 재미있냐. 뭐 그런 거 있잖아 인사팀 사람들이 잘 물어보는 거. 그래서 프로젝트가 더럽게 재미없고 지겨워 미치겠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다른 팀으로 이동시켜 주더라고.]
 입 만 열면 허세를 부려대는 터라 약간의 과장이 있겠지만, 인사팀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과감하게 하다니…….. 그리고 그게 받아들여지다니……. 놀랍고 허무했다. 허탈하게 뒤 돌아 서는 등 뒤로 JS 가 한마디 덧 붙였다.
[팀을 옮기고 싶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인사팀 찾아가서 말해 봐.]
[응. 시간 내줘서 고마워.]
대답을 하고 자리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그동안 불만이 있어도 하기 싫은 일이 있어도 잠자코 인내했던 시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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