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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May 31. 2021

도대체 장녀가 뭐길래?

잘 가라 장녀야! 멀리안 나간다!


도대체 장녀는 어떤 존재일까?


 어렸을 적 아마도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쌀쌀한 초겨울 저녁 무렵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 집에 들어갔을 때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동생과 함께 놀러 나갔고 돌아올 땐 혼자 돌아왔던 모양이다. 엄마는 혼자 돌아온 나에게 동생은 어디 갔냐고 물었고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곧바로 양동이에 있는 물을 바가지에 가득 퍼서 밖에 서있는 나에게 냅따 끼얹으며 말했다.

‘나가서 동생 찾아와! 못 찾으면 들어 올 생각도 하지 마!’

 서슬 퍼런 엄마의 호통에 머리부터 발 끝까지 홀딱 젖은 채 동생을 찾으러 나갔다. 동네를 돌며 아무리 찾아봐도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찾기를 포기하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주변은 어둑어둑 해 지기 시작했고 물에 젖은 옷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덜덜 떨며 그네에 앉아 있는데 저 멀리서 엄마와 동생이 손을 잡고 나를 찾으러 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나로, 장녀로서 동생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 엄마는 나를 가차 없이 혼냈다. 그래 봤자 나는 동생보다 2살 더 많았을 뿐이다. 누나로서 동생을 살뜰히 챙겨야 했고 양보해야 했으며 동생이 잘못하면 같이 혼나고 같이 체벌을 당했다. 엄마가 시킨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동생이 더 하게 되는 날에는 여지없이 욕먹을 각오를 했어야 하므로 나는 종종 동생에게 내가 더 일을 많이 했다고 말을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착한 동생은 고맙게도 나의 부탁을 잘 들어주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당연히 내 월급을 집안 살림에 보태기 시작했다. 이래서 장녀는 살림 밑천이라고 하나 보다. 내가 번 돈을 혼자 쓴다는 것은 엄마의 가정교육에 빗대어 보면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름지기 딸은 고생한 부모님을 위해 나의 수입 일정 부분을 기꺼이 나눠야 한다는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받아왔기 때문이다. 파렴치한 딸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돈을 보탰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했다. 두 분 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가끔 부모님의 친구분들이나 친척들은 내가 부모님에게 그렇게 효녀 노릇을 잘하고 있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셨다. 역시 딸은 첫째 딸이 최고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으며 훌륭히 장녀가 본분을 다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내가 대학교 졸업할 때쯤이 되자 엄마는 다른 집 딸들이 시집을 가면서 집안에 어떠한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갔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었다. 엄마에게 작은 옷가게를 선물해 주고 시집간 같은 동네에 사는 어느 집 장녀, 아파트 계약금을 선뜻 내주고 간 엄마 친구의 첫째 딸, 집 안에 헌 가구들을 모두 새 것으로 바꿔주고 시집을 간 이름 모를 건너 건너 지인의 장녀 등 대한민국 장녀들이 모두 다 그렇게 능력이 있는 줄 엄마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나도 그녀들만큼 능력이 좋았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고작 결혼식을 하는데 드는 일체의 비용과 신혼집 전세 자금 일부를 부모님 도움 없이 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 죄책감에 내 앞으로 들어온 축의금 전부를 부모님께 드렸다. 부모님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으시고 각자의 몫을 챙기셨다.


결혼을 하고 나는 남편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장녀의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변함없이 부모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했고 가족을 생각해야 했다. 남편은 이제 너의 가족은 ‘나와 너’라고 말했지만 장녀의 역할은 그렇게 끝이 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내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엄마를 챙겨야 했고, 친할머니, 외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남동생 장가를 보내주는 일 까지 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캐나다로 떠난다고 인사를 드리러 간 자리에서 친할머니는 동생 장가보내고 떠나라고 소리를 지르셨고 외할머니는 동생은 어떻게 하냐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짊어지고 가는 장녀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누군가 또는 부모님이 강제적으로 해야 한다고 계약서에 명시한 적도 없었고, 그래야만 하는 법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부분이 나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나는 점이었는데, 스스로 아무도 시키지도 않은 일을 몇십 년 동안 끙끙 앓으며 당연히 감내해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까짓 첫 딸이 최고라는 소리, 효녀라는 소리, 엄마의 든든한 친구 같은 딸이라는 소리 안 듣고 말면 그만이었을 것을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다가 병까지 얻어 만신창이가 되었는지 소위 말해 현타가 온 후 마음을 추스르고 글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되기까지 몇 달은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단계는 분노와 원망이었다. 활활 타고 있는 시뻘건 불덩어리 하나를  급하게 삼킨 듯 가슴이 타 들어갔다. 나에게 도대체 왜 그랬을까? 어린 나에게 왜 그렇게 욕을 했을까? 왜?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꿈에서 까지 되풀이했다. 집에서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가슴을 내리치며 통곡을 했다. 그런 날이 며칠씩 되풀이되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밤이 되면 더욱 감정이 복 받혀 통제가 되질 않았다.

두 번째 단계는 자괴감이었다.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나는 했던 말을 줄곧 반복했다. 되풀이되는 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침착하게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설명해 줬다. 그의 말을 듣고 수긍한 채 돌아서고 몇 분 후 면 또 같은 질문을 했다. 마지막은 공허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이 허무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렵고 막막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면 시원하게 안 보고 관계를 끝내면 그만이지만 나를 낳아 준 부모님이었다. 하지만 너무 미웠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설명을 듣고 싶기도 했고 그 후엔 용서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몇 달은 아예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거의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묻는 내 전화가 끊기자 엄마는 당황해했다. 왜 연락을 하지 않느냐고 궁금해하며 문자를 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아빠에게는 연락 조차 오지 않았다. 캐나다로 온 지 9년 동안 아빠가 내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딱 3번 있었는데 돈이 좀 필요 한데 융통을 해 줄 수 있겠냐고 물을 때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자유 로워 질 수 있을까 숨 쉬듯 밤이고 낮이고 고민을 했다. 100세 시대니 뭐니 하는 마당에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을 텐데 이렇게 남은 인생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나머지 인생이라도 온전히 내 삶을 살고 싶었다.


세상엔 이미 널리 알려진 간단한 진리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것들을 수시로 접하면서도 정작 본인에게 대입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인연이 맺어지게 되면 죽으나 사나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모든 것을 해쳐 나가야 한다 라는 진부한 공식이 있다. 드라마에서, 노래 가사에서, 영화에서, 소설에서 가족애를 그린 이야기들은 차고 넘친다. 단 몇 문장으로 정의할 수도, 관계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는 복잡 미묘한 관계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나도 내 인생을 찾아 살아야겠다는 일종의 각성을 겪게 되면서 아무리 애틋하고 마음이 쓰여도 가족들 간에도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현재와 미래는 부모님에 대한 걱정과 분노와 서러움과 연민에 저당 잡혀 있었다. 나중에 그들을 부양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미래의 어떤 행복도 꿈꾸기 힘들었다. 나의 미래는 그렇게 암울했었다.


우선,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고민을 그만 두기로 했다. 부모님, 특히 엄마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으시고 그 사실 때문에 불안해하시지만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내가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부모님처럼 나도 부모님의 도움 없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물론 세상에는 좋은 능력과 운을 가지고 무일푼에서 일궈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더 이상 그 사실이 답답하고 부끄럽지 않다.


부모님을 이해하고 용서하자는 노력 또한 그만두기로 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아니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몰랐을 뿐이다. 남편과 아내로서 대화하는 방법, 자녀와 대화하는 방법. 그리고 가장 가깝지만 소홀하기 쉬운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점들이 고쳐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우리 가족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기로 했다.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동생도 결혼해 새 가정을 꾸렸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지키고 싶어 했던 그 가족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각자 우선시해야 할 자신들만의 가족이 있다. 세월이 흐르고 더 나이를 먹게 되면 누군가에게 의지 해야만 할 시간이 부모님에게도 다가오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것이며 그때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것이다. 그들도 어른이고 인생살이에 대해선 나보다 경력자이시니 잘하시리라 믿는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이해하는 대신 나는 적당한 거리 두기를 택했다.


 연락이 뜸해진 내게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네가 엄마 때문에 고생한 거 다 알아. 엄마가 표현을 못해서 그런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다 알고 있다고. 그저 말을 못 할 뿐이야.’

이해한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연습 없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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