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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근화 Jul 17. 2020

막걸리

2016년, 내가 대학교에 갓 입학한 새내기였을 무렵의 일이다. 첫 아르바이트로 편의점에 취직한 나는, 약 6개월간의 재직 기간 동안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각종 진상에 대한 괴담이 결코 창작의 소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 진상 중의 하나였던 한 아저씨의 행태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날은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고, 나는 방금 도착한 발주 상품을 매대에 정리하는 중이었다. 편의점에 입성한 아저씨는 여느 날처럼 망설임 없이 주류 냉장고로 돌진하여 막걸리 두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 달갑지는 않았으나 그도 분명한 ‘손님’이었기에, 아저씨가 계산대로 다가오면 캐셔는 손님이 기다리지 않고 계산을 마칠 수 있도록 계산대로 빠르게 복귀할 의무가 있었고 매대 정리가 급했던 나는 계산대를 계속 곁눈질하며 기계와 같은 손놀림으로 상품을 진열했다.

그날은, 어째서인지 삼각 김밥의 오와 열에 너무 열중하여 잠시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돌아오지 않는 캐셔를 기다리다 울분이 담긴 사자후를 토해냈다. 나는 깜짝 놀라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며 빠르게 계산대로 튀어 갔다. 하지만 말뿐인 사과는 그의 노여움을 풀기에는 부족했고,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산대 위에 있던 막걸리 두 병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가게를 떠났다. 비록 먼저 실수한 부분은 있었지만 손님의 행태는 분명히 선을 넘은 것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혈기를 억누르며 바닥을 촉촉이 적신 막걸리를 닦기 위해 대걸레를 가지러 갔다.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걸레질을 했던 기억이 아직 선명히 남아있다. 나는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그만뒀고, 1학년을 마치고 난 뒤 군에 입대했다.

씁쓸한 뒷맛을 남긴 아르바이트, 그리고 인간 군상의 극과 극을 경험할 수 있는 군 생활을 겪은 뒤 나는 꽤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첫인상이 안 좋은 사람은 절대로 그 인상을 바꿀 수 없다.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 가지기에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인생관이었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나의 인생관을 증명하는 사례들을 눈앞에 내놓았다. 나는 이런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 나 자신이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엉뚱하게도 내면이 아닌 외면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헬스장을 등록했다. 그리고 삐쩍 곯은 팔뚝을 소심하게 가리며 프리웨이트 존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그 비관적인 인생관을 만들어 준 장본인과 재회했다.

나보다 족히 두 배는 무거운 덤벨을 들고 거울 앞에 서 있던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근육을 감상하고 있었다. 비록 그때와는 얼굴이 많이 바뀌었으나 나는 그를 알아보았고,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자리를 뜬 이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운동을 시작하지 못하고 눈으로 그를 쫓았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명제에 대한 훌륭한 반례가 내 앞에 있었고, 그 반례는 비관과 냉소로 가득했던 나의 인생관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느낀 복합적인 감정 중에는 감동이 분명 섞여 있었던 것 같다. 아무 연고도 없는 한 알콜 중독자의 변화가 무슨 연유로 나에게 감동을 선사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변화한 그의 모습은 분명 감동적이었으며, 나는 그날 6개월의 아르바이트와 21개월의 군 생활에서도 얻지 못했던 귀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간혹, 고쳐 쓸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인생이란 본디 장애물의 연속이고, 잘못 심어진 첫인상은 그중에서도 특히 극복하기가 어려운 장애물이지만, 간혹 그 높은 허들을 넘어서는 인생이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극복해내는 인생은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굳이 의미 부여를 하자면 아저씨가 막걸리를 좋아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는 탁한 가루가 가라앉으면 드러나는 막걸리의 맑은 액체와 같은 사람이었다. 아직 가루가 가라앉지 못해 탁하고 흐릿한 모습만을 세상에 보여주는 막걸리가 있다면, 적어도 나만은 그의 맑은 일면을 봐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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