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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Mar 11. 2023

대수롭지 않은 이별

그렇게 꼭 빠져야 후련한 관계라면, 그렇게 해요!


상처를 받았다는 말처럼 들렸다.


대수롭지 않게 보내드릴게요!


무척, 대수로워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간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건 진심이길.


남은 인생, 즐겁고 밝은 마음으로!


그다지, 쿨하게 들리진 않았다.


-


얼마 뒤 그의 프로필에 사진이 사라졌다. 송금할 수 있는 버튼이 없어진 걸 보고 날 차단했구나 싶었다. 마침내 멀어졌다. 상실감 비슷한 감정이 일었지만 눈물이 나진 않았다. 이번에 우리에겐 두 번째 이별이었으니까. 


-


나도 물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


그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봄이었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랜기간 그의 글을 관찰했고, 어느순간부터 그가 가진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나의 직장에서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글의 결이 다른 것을 그들은 글의 가치가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칭찬과 비꼬는 말을 섞어서 자주 건네기도 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때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카피라이터 출신이었다. 그의 글의 세계는 내가 가야할 다음 세계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마음을 알았다. 어느 날 나의 집 앞으로 찾아와, 한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


그는 글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


돌이켜보니, 그가 내게 했던 그 어떤 약속도 지켜진 것이 없었다. 자주 거짓말을 했고, 나는 늘 오래 기다렸다. 그 사람의 변덕스러움에 늘 휘둘리다 딱 한번 화를 냈다. 애초에 맞춰갈 마음이 없었던 그는 되려 나를 탓하며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보자는 말은 그래도 지켜줬으면 했다. 책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오후 두 시의 볕을 꺼려한다며 올 수 없겠다고 했다. 약속을 앞두고 갑자기 약속이 사라지는 건 그에겐 참 쉬운 일이었다.  


-


몇 년이 지났고, 잊고 살았던 그가 문득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그의 글을 보러 갔다. 혼자이거나 혹은 가족을 만들었거나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을 기대했지만 그의 일상은 고통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나셨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란 글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지 나는 몇 줄의 글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는 대번에 그 글을 쓴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자신을 용서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괜찮으면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언제든, 내 시간에 맞추겠다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그를 다시 만났다. 


-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그는 이번엔 그래도 한 번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냈다. 그리고 한 번 뿐이었다.


-


그가 내게, 했던 말을 지킨 건 단 한 번 뿐이었다. 


-


나도, 고민이 없던 건 아니었다. 다시 인연을 잇는다면 우린 뭐가 될까.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당신이 그때보다 성숙해져 있다면, 나는 그래도 당신을 지인으로 둘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우리가 어쩌면 아직 감정이 남아있다면 힘든 겨울을 보내고 함께 봄을 맞을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지나간 아픔은 지났기 때문에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간 아픔은 그 아픔을 준 사람도 지나갔기에 그저 잊혀진 것처럼 느끼는 것 뿐이었다. 그의 존재를 가까이서 느낄 수록 양가감정이 일었다. 


-


그리고 당신은, 왜 하필 나를 버리고 그녀를 만났던 걸까. 그리고 왜, 굳이 그녀를 만났다는 걸 나에게 알려준 것일까. 차라리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나는 좀 덜 비참했을 것 같은데. 나이를 속이고, 신뢰를 저버리고, 바람도 하필, 불륜으로 저지른 그녀 때문에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는 소리를, 하필 내 앞에서 하는 당신은 좀 모자란 사람 같다. 


-


당신은 이상하게 당신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꼼짝을 못하더라.


-


오래 고민했고, 결국 정해진 끝은 같을 거라는 걸.


-


힘든 계절이 지난 것처럼, 나는 이만 당신의 삶에서 지나가야 할 것 같아요.


-


당신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이별이었나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나는 그러지 않았아요. 그래도 한 번의 약속을 지켜준 것. 그걸로 나도 괜찮아졌어요. 당신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아마도 상황이 좋았더라도 우린 결국 다른 길을 걸었을거라는 걸 알았어요. 동경했던 당신의 세계보다 이젠 내 안의 세계를 더 사랑하게 되었네요. 우리가 우리가 될 수 있는 곳은 이제 없어요. 당신의 잘못은 아니예요. 나의 잘못도 아니예요. 우린 그저, 스쳐야했던 인연이었을 뿐.


-


생일, 축하해요.



2023.3.11

M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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