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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디 Sep 28. 2024

처음 가는 미국

1년간의 여행이 시작되다.

남편도 나도, 아이들도 미국은 처음이다.

여행을 꽤나 좋아해서 참 많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미국은 가볼 생각을 안 하고 살았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될수록 '청소년 시기에 미국처럼 넓은 나라에서 살다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 생각이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커다란 이민가방 10개에 4인가족 일년살이 짐을 쌌다.

남들은 짐 싸는 것만으로도 두 번은 못하겠다는데, 나는 17년간의 살림까지 다 처분해야 했다.

덕분에 미국에 간다는 설렘과 걱정 따위는 할 여유가 없었다.


짐을 다 부치고 비행기 좌석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가 미국에서 살다니..."

"그러게"


우린 미국에 친인척 한 명 없고, 주재원들처럼 지원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태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의 나이도 남들이 다 걱정하던 중1, 중3이 시작되는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무모한(?) 용기를 냈다.

6년 전 연고지 하나 없는 제주로 이사했을 때처럼.




처음 마주한 미국 LA

11시간의 비행 끝에 말로만 듣던 LA. 그 LA공항에 도착했다.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들은 빠른 눈으로 짐을 찾아 내리고 카트에 실었다.

미국같이 큰 나라가 공항카트는 왜 이리 작은지 4개의 카트에 겨우 모든 짐을 올렸다.

아이들이 제법 한몫했다.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공항밖으로 나왔다.

1월의 LA는 서울과 공기가 매우 달랐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낯선 버스들이 있는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미리 약속해 두었던 한인기사님을 만나 짐을 테트리스처럼 쌓아 올리고 샌디에이고까지 가는 동안 우리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와~ 너무 미국 같아", "응~ 여기 미국이야"였다.


2시간여를 달려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LA보다는 한적하고 조용한 느낌의 동네다.

우리가 계약한 집은 입주시기가 맞지 않아서 일주일간 근처 호텔에 머물러야 했다.

이 많은 짐을 호텔방에 다 들여도 되나 싶었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아니면 남의 일에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미국인이라서 그랬는지 직원들은 산처럼 쌓여있는 우리의 짐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체크인을 하고 방 한쪽에 짐을 쌓아 올린 후 우리 네 명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침대에 다 같이 누웠다.


여행과 달리 지금부터 해야 할 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차부터 사야 하고 아이들 학교도 등록해야 했다. 계약해 둔 집의 오피스에도 가봐야 하고, 아! 폰 유심부터 해결해야겠네.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이 와중에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배가 고프다고 한다.

"어디 가서 뭘 먹지?"

"엄마~ 여기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거 같던데?"

"직원한테 가서 물어볼게"

남편이 잠시 프런트에 나갔다 오더니 바로 근처 주유소에 붙어있는 편의점이 있다는 정보를 갖고 왔다.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온다는 말에 아이들이 절대 안 된다며 아빠를 말린다.

해질 무렵이었는데 우리가 지금 서로 전화도 안되고, 더구나 주유소라니 너무 위험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괜찮을 것 같았는데.. 굳이 아이들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가 가져온 먹을거리에서 해결을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먹을 건 많았다. 햇반에 참치캔, 김 그리고 양가에서 소중하게 꽁꽁 싸주신 각종 밑반찬과 김치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햇반에 김만 싸 먹어도 맛있었다.


호텔에서의 일주일은 시차적응의 시간들이었다.

처음 2-3일은 오후 2시쯤 자고 저녁 10시에 일어나고 새벽 2시쯤 잤다가 새벽 6시에 깨는.. 그런 이상한 바이오리듬이 만들어져 버렸다. 덕분에 조식은 하루도 안 빼놓고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워낙 편식 없는 가족이라 매일 아침 제공되는 전형적인 미국식 조식도 다들 잘 먹었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노트북에 매달려 업무를 나누어 맡았다.

차를 구입하는 일은 금방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우선 보름간 렌트를 하기로 했다. 폰 유심은 우선 호텔 와이파이를 쓰고 있었으므로 입주를 하면 해결하기로 하고, 아이들 학교는 전화를 해보니 서류를 접수하고 테스트를 하자고 해서 바로 다음날로 날짜 약속을 잡았다. 겨울방학도 없이 한국을 떠나온 아이들은 조금 더 쉬었다 학교에 가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미국 중학교는 이미 개학을 한터였다.

"엄마아빠도 모르겠어. 일단 그냥 가보자"


모든 것이 '일단 그냥 해보자'였다.

엄마아빠도 미국은 처음이라 잘 모른다는 말에 아이들도 무턱대고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이들이 우리를 챙기는 순간들도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우리 네 명이 서로를 돕는 동반자가 되도록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정착 업무를 해나가던 어느 날 저녁.


빵!!!


뭔가 터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너무 놀라 우리 넷은 서로를 쳐다보고 순간 이게 어디에서 난 소리인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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