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오히려 천국같았다.
위 글에서 이어집니다.
안 그래도 미국에서 두려웠던 것 중에 하나가 총소리였는데, 호텔방 안에서 빵! 소리라니.
너무 놀라서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우리 네 명은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잔뜩 쌓아두었던 우리의 일년살이 짐이다.
아... 김치!
미국에 도착해서 엄마한테 전화했을 때 가장 걱정하시면서 물었던 건 "김치 괜찮니?"였다.
그래서 바로 확인해 봤는데 아무리 연중 온화한 샌디에이고라도 1월이었기에 김치는 하나도 부풀지 않고 멀쩡하게 잘 있었다. 당일도 괜찮았고 그다음 날도 괜찮길래 계속 괜찮나 보다... 하고 건드리지 않고 두었다. 그런데 관심을 안 주던 5일째 저녁 김치 유산균의 활발한 발효활동 끝에 그 두꺼운 김장비닐을 터트린 것이었다.
김치 봉투가 터졌을 거라고 생각하자 가방을 열어보기 두려워졌다.
제발... 수습 가능한 상태이길.
남편도 아이들도 우르르 몰려와 김치박스 개봉을 쳐다보았다.
이민가방을 열어보니 김치통 플라스틱 뚜껑이 들려 있었고, 그 뚜껑 잠그는 날개 한쪽이 깨져있었다.
"와~ 이게 날아갔네"
그리고 예상대로 김치를 담았던 김장비닐이 터져있었다. 다행인 건 엄마의 꼼꼼한 포장으로 김장비닐이 이중으로 포장되어 있었다는 것. 바깥쪽 비닐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다행이다. 괜찮아 괜찮아~"
이게 뭐라고... 다들 그렇게 긴장을 했나. 순간 우리 네 명은 웃음이 빵 터졌다. (아.. 빵! 그만 써야지)
길게 느껴졌던 일주일간의 호텔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계약해 두었던 집에 입주를 했다.
두어 달 전, 이 집을 렌트하겠다고 남편은 줄기차게 이메일을 보내고 시차 맞춰서 국제전화도 했었다. 그때 우리를 담당했던 직원이 스티브였는데, 드디어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다.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직원들을 보니 마치 아는 사람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집 렌트하는 과정에서 꽤나 귀찮게 했음에도 이렇게 반겨주다니.. 정말 다들 천사 같아 보였다. (실제로 그곳에서 지낸 1년 동안 우리 아이들까지도 잘 대해주셔서 정이 많이 들었고, 아직도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천사였음에 틀림없다.)
집은 2층짜리 아파트였는데, 우리는 2층으로 계약했다. 사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주변 학군도 좋고 초, 중, 고는 물론이고 도서관, 스포츠클럽 그리고 길만 건너면 꽤 규모가 큰 몰이 있어서 입지가 굉장히 좋은 곳이었기에 매물이 잘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지내본 사람들도 추천을 해줬고, 그 주변 아파트에서 지낸 사람들마저도 그곳을 추천해 줬다.
우리가 미국에 들어가는 시기에 마침 딱 1개의 집이 있었는데, 사실 그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한국에서 그 아파트 홈페이지가 원활하게 접속이 안되어서 이런저런 시도 끝에 결국 VPN으로 해결했는데, 그 사이에 우리가 봤던 그 집을 다른 사람이 계약을 잡아버린 것이었다. 스티브도 그 과정을 알고 있었고 우리가 연락을 많이 했었기에 같은 마음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집을 계약했던 사람이 방 한 칸짜리 집으로 옮기고 싶다고 해서 보류 중이니 조금 기다려보라는 연락을 받았고, 결국 그 집은 우리에게 왔다.
이 과정을 스티브와 함께 했으니 우린 만나자마자 원래 알았던 사람들처럼 반가웠던 것이다.
스티브는 기분 좋은 미소로 "여기 계약에 성공한 너희가 위너야~"라고 해줬다.
많은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함께 단지 내 시설을 둘러보았다.
샌디에이고의 날씨 덕분인지 마치 리조트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었다.
넓은 수영장과 헬스장 그리고 잘 정돈된 테니스장과 야외 바비큐시설을 보며 아이들도 신나 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1년간 지낼 집을 처음 마주했다.
신축도 아닌데 집이 너무 깨끗했다. 벽은 페인트칠이 깨끗하게 되어 있었고, 냉장고와 오븐 등 주방가전들도 너무 깨끗했고, 욕실은 리모델링을 한 것처럼 반짝거렸다.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청소를 해야 하는 우리나라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는 너무 감동했다.
(물론 1년 후 집에서 나올 때는 그 정도 수준으로 청소를 하느라 힘들긴 했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도 있었다.
미국은 샤워기가 보통 벽에 고정되어 있는데, 이 고정샤워기로는 뭔가 제대로 씻는 기분이 안 들어서 코스트코에서 줄 샤워기를 사 왔다. 스티브에게 연락을 하니 교체해서 쓰고 나중에 원상복구만 하면 된다며 설비팀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다. 미국이라서 며칠이나 지나서 올 줄 알았는데 바로 다음날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오셨다. 유쾌하게 인사를 해주시더니 샤워기를 보고 금방 바꿔주셨다. 줄 샤워기 헤드 부분이 자석으로 되어 있어 탈부착이 가능했는데 제품이 아주 나이스하다며 엄지 척을 해주셨다.
우린 너무 고맙다며 미리 준비해 둔 팁을 드렸다.
아니 그런데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팁 문화가 당연하다는 미국에서 팁을 마다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한 건 우리였다.
"이런 건 여기 아파트에서 제공해 주는 서비스니까 진짜 팁 안 줘도 돼. 마음 쓰지 마" 하며 신발을 신으시는 아저씨에게 "에이~ 그래도 저희 마음이니까 받으세요" 하면서 남편은 아저씨 손에 음료와 함께 팁을 쥐어드렸다.
"음료수를 주는 건 한국인의 문화예요"라고 말하자 아저씨는 웃으면서 "오 정말? 그럼 받을게. 고마워" 하고는 손을 흔들며 가셨다.
미국인데 뭔가 한국인의 정서가 느껴졌다.
처음 간 미국을 우리는 샌디에이고에서 그것도 이렇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의 배려를 받으며 시작했다.
총기사고, 마약문제, 인종차별 등의 두려움을 한편에 갖고 시작한 미국생활이었는데 그런 걱정을 한 게 무색할 만큼 미국은 전혀 무서운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은 천국인가?"싶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