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도깨비>의 대사를 떠올리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좋다.
햇빛 찬란한 날에는 볼 수 없는 담백한 수묵화 같은 정경을 가는 곳마다 마주하게 될 테니.
깊게 스며든 역사의 아픔이 빗물에 씻겨 내려간 듯, 단아한 자태로 서 있는 성곽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맑게 만든다.
비 오는 날 상념에 젖어 걷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평지인가 싶으면 어느새 오르막 그리고 내리막, 지형 그대로 들락날락한 성곽길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까지 다양한 배치는 파란만장한 인간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전쟁과 평화, 과학과 문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화성은 새로운 풍의 성답다.
어느 신하가
“외적을 방비하는 성을 이렇게 아름답게 지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아름다움으로 능히 적을 방비할 수 있다.” 고 한 정조의 대답에 어쩐지 수긍하고 싶어진다.
수원 화서문 성곽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총동원하여 가장 아름답게 축조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정조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통치의 근간을 ‘효’에 두었던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국가의 모습을 화성에 담고 싶었을 것이다.
그곳은 할아버지 손에 죽은 아비 사도세자의 피맺힌 절규도, 아비를 살려달라 애원하던 어린 정조의 애달픈 울음도, 아들을 지키기 위해 지아비를 외면했던 혜경궁 홍씨의 서러운 한도 없는 곳일 거다.
기구한 운명의 부모를 위로하려는 사모곡이 들리는 듯하다.
이런 정조의 마음이 200여 년을 훌쩍 넘어, 지금 이곳을 찾는 사람들 마음에도 와닿는 걸까?
화성 하면 ‘효’라는 글자를 한 번쯤 떠올리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화성행궁
조선시대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왕과 어머니를 꼽으라면 단연코 정조와 혜경궁 홍씨일 것이다.
인생을 한편의 연극무대라고 본다면 이렇게 희비가 교차하는 각본도 드물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인생은 그야말로 새드앤딩이다.
오죽했으면 그녀가 만년에 쓴 회고록 인 <한중록>의 또 다른 이름이 <읍혈록(泣血錄)>일까.
그러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다르다.
남편마저 제물로 버려야 했던 비정한 현실 속에서, 어린 아들을 지켜 끝내 왕좌에 앉혔다는 면에서 해피엔딩이다.
엄마로서 그녀는 강한 집념과 인내의 소유자였다.
자식을 위해, 뒤주에서 죽어가는 아비를 살려달라 애원하던 아들 손을 낚아채듯 모질게 잡고 나온다.
그리고 남편을 죽인 영조의 미움이 아들에게 대물림 되지 않도록 “저희 모자가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이로소이다.”라고 처연히 말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조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영조의 장남 장현세자의 양자가 되는 청천벽력 같은 일도 감내해낸다.
그날의 비통함은 한중록에 이렇게 나와 있다.
“위에서 하시는 일을 아랫사람이 감히 이렇다 하겠나마는 그때 내 심정은 망극할 따름이었다.
내가 임오년 화변 때 모진 목숨을 결단치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라고.
자기 배 아파 낳은 아들이 이제 공식적으로는 자기 자식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글로써 피를 토하듯 절규했을 뿐, 의연하게 버텨낸다. 아들이 왕이 되는 그날을 위해.
영조가 죽기 전까지 12년을 견딘 끝에, 마침내 왕이 된 아들을 보는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여느 어머니가 느꼈을 기쁨과 더불어 찬란한 슬픔도 마음 한편에는 있었으리라.
남편은 죄인으로 죽었고, 그로 인해 자신은 왕의 어머니인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는 슬픈 별곡의 주인공이기에.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둘은 모자지간이면서 어찌 보면 전우관계다.
죽고 죽이는 권력투쟁의 전쟁터에서 끝내 함께 살아남아 승리를 쟁취했기에 전우애 또한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위로하려 정조는 멋진 화성을 짓고, 사도세자 무덤 곁에서 어머니 회갑연을 성대하게 열어준다. 6000명 행차대를 직접 진두지휘하는 아들과 함께 화성으로 향하는 가마 안 혜경궁 홍씨를 상상해 보라. 이때가 그녀에게는 가장 빛나는 봄날이었을 거다.
남편의 무덤가에 33년 만에 선 혜경궁 홍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외면해서 미안하다.”며 아내로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테지.
그렇지만 이내 “내가 지켜낸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 정조를 봐라”며 가슴을 활짝 폈을지도 모른다.
정조대왕 화성 행차도가그려진 담
정조는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와 함께 이곳 화성에 머물 생각이었으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
자식마저 먼저 떠나보낸 혜경궁 홍씨의 억장은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것이다.
정조 사후 방패막이가 없어진 그녀는 친정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의 권력 암투로 인해 친정아버지와 동생을 잃는다. 끝까지 굴곡 많은 인생이다.
나중에 <한중록>을 읽은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존으로 추존하자, 비로소 헌경왕후가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열 살에 궁에 들어와 보낸 70여 년의 세월, 봄날은 짧고 겨울은 길었던 삶이다.
그래도 효심 깊은 정조와 함께 영원히 화성을 거닐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역시 그녀의 일생은 해피엔딩이라 말하고 싶다.
서장대
효와 새로운 문화의 상징인 화성은 야경도 아름답다.
작년 5월 저녁 무렵, 조명이 비춰 멋지게 빛나던 성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차에서 잠깐 내려 사진을 찍었더랬다. 그날은 수원 사는 후배 덕분에 경기아트센터에서 <친정엄마와 2박3일>을 관람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누가 뭐래도 세상 끝까지 내 편’이라는 포스터 문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딸과 엄마의 질박한 사랑이 보는 이의 눈물샘을 터뜨린 연극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바라본 화성은, 역사 속 모자간 애틋한 스토리를 떠올리게 했다.
정조가 어머니 회갑연을 위해 이곳에 8일간 머물렀다고 하니, ‘왕의 엄마와 7박8일’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듯하다.
어쨌든 이날부터 화성하면 자연스레 <친정엄마와 2박3일>이 연상된다.
밤하늘 은하수처럼 빛나던 성곽 위로 높이 떠 있는 열기구를 타고, 보고 싶은 엄마에게 날아가고 싶다.
나에게도 그런 엄마가 있었다. 교통사고로 내 곁을 떠난 2011년까지는.
‘누가 뭐래도 세상 끝까지 내 편’인 엄마를 갑자기 잃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사고를 낸 상대방에 대한 원망, 가는 곳마다 눈에 밟히는 엄마와의 추억,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와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박노해의 시가 비통한 절망의 시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위로의 말을 건넨 건.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러니 그대 끝내 사라지지 마라 중>
시는 내게 펑펑 울 수 있는 따뜻한 품을 내주고, 다독여 주었다. 마치 엄마처럼.
삶의 의지가 느슨해지던 순간에, 사라지지 말라고 영혼을 건져 올리는 시가 곁에 있었다는 건 불행 중 만난 행운이었다.
가랑비 내리는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세상에 남겨진 이들이 화성에서 만났다.
딸과 2박 3일을 보낸 친정엄마, 함께 이곳에서 살자고 약속한 아들을 먼저 보낸 혜경궁 홍씨, 엄마를 사고로 잃고 허허로이 살아가고 있는 딸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만감을 담아 엄마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