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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Feb 12. 2024

엄마는 왕따야

학부형 모임은 곧 죽어도 싫었다. 엄마들끼리 모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몰라도 내 관심사와는 멀어 보였다. 다른 집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떤 학원에 보내고 어떤 사교육이 필요한지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다면 좋았던 나에겐 학교 엄마들이 아닌, 교육 일선에 전문가로 일하는 지인들이 주는 정보만도 차고 넘쳤다. 더 필요한 건 교육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관련 도서에서 얻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아는 걸 나누는 데엔 거리낌이 없었지만, 자칫 잘난 척하는 듯 보일까 저어 됐다.


가진 교육 정보의 양과 별도로 딸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학원 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내겐 긍정적이진 않은 탓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찾으며 살았으면 했다. 학교가 끝나면 부모와 속살거리며 자기 경험과 감정을 원 없이 나눴으면 했다.


학교 입학 후 며칠은 딸을 교실 앞까지 데려다줘야 했다. 유아와 아동 그 언저리에 있는 초등 1학년을 위한 학교의 특별한 배려였지만 나는 몹시 불편했다. 교문 앞까지만 데려다주면 딱 좋은데 말이다. 딸아이가 교실로 쪼르르 뛰어 들어가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학교를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땅만 보고 걸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같은 반 엄마들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엄마들 사이 나는 왕따였다. 같은 반 엄마들 모임에 조건 없이 배제되었다. 오고 가는 길에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과 없이 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반면 궁금했다. 그들에게 제공한 정보랄 게 딱히 없는데 무얼 근거로 뒷담화 거리를 찾았는지 말이다. 놀라운 능력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무얼 바랐을까? 나의 외로움? 서운함? 아니면 분노? 결국에 그들 앞에 비굴하게 엎드리는 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나와 친밀해지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물어보기도 뭣해 넘겨버렸다. 그들의 바람은 알 길 없지만 나는 무척 즐거웠다. 누구도 내게 딸아이를 '이리 가르쳐야 한다, 저걸 배워야 한다,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다'이르지 않으니 평안했다.


딸과 나는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아침마다 고사리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등교했다. 오늘은 누구와 놀 건지 조잘거리는 딸에게 집중하다 보면 교문 앞이었다. 하교도 비슷했다. 집안일을 후다닥 끝내고  학교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방과 후 수업도 학원도 다니지 않았던 딸을 만나 각자 떨어져 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와 무얼 하고 놀았는지, 선생님에겐 어떤 질문을 했는지,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는지 나누다 보면 집이었다.


딸이 학교를 다녔던 시간은 4년이다. 그 기간 내내 나는 왕따였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4년이었다.


우리를 휘두르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가족의 교육관을 지키는 게 가능했다. 언제가 되었든 홈스쿨링을 하고 싶었던 내 뜻을 적극 반영해 딸과 다양한 시도도 했다. 우리만의 속도와 방법이 무언지 발견하는 소중한 경험의 연속이었다.


딸을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할 일도 없었다. 학교에서 주는 상이 딸을 평가할 기준이 되지도 않았다. 그저 학교 친구들과 소소한 재미를 가득 담아내길 바랐다. 매일 조잘대는 딸을 통해 어느 친구는 같은 반 아이를 좋아하고, 어떤 친구는 김치를 죽어도 먹기 싫어하고, 또 다른 아이는 빨리 어른이 되어 독립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단 냄새가 풀풀 풍기는 선생님과 대화하려면 코를 막고 싶다는 이야기, 교장 선생님과 마주치기 싫어 길을 돌아갔다는 속삭임, 오빠 같은 원어민 선생님을 여자 아이들이 좋아라 따라다니다는 키득거림으로 우린 즐거웠다.


교문 앞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은행나무는 '하트' 모양이었다는 걸 딸과 나는 알았다. 연둣빛으로 수줍어하다 푸른빛으로 의기양양해하고, 노랗게 물들어 빛나다 앙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하트 나무를 사철동안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한 해 어린 후배에게 머리를 쥐어터진 날, 우리만의 의식을 치른 철봉도 있다. 철봉에 매달려 놀던 딸과 딸의 친구를 이유 없이 때리고 도망간 녀석. 잡아다 쥐어 패고 싶은 후배의 이름을 크게 한 번 부르고 입안 가득 모은 침을 땅바닥에 힘껏 '퉷!'하고 뱉은 후 마음속에 움튼 미움을 묻었다. 발로 꼭꼭 눌러 미움을 묻었던 철봉은 지금도 건재하다.

생존 수영하러 가서 딸을 밀어 물에 빠트린 녀석을 용서하기 위한 우리의 절절한 기도의 순간도 있었다. 수학 시험에 100점을 받지 못한 딸에게 '너희 엄마는 학원도 안 보내 주냐?' 하던 담임의 날 선 빈정거림도 있다.

100권의 책을 읽고 독후 감상문 100편을 써내면 선물을 주겠다는 선생님의 꼬임에 홀라당 넘어가 1등으로 100개의 스티커를 채운 딸의 열심도, 처음 참여한 운동회에서 꼴찌를 하고 터지려는 울음을 꾹꾹 눌러 참은 서러움도, 수업 사이사이 주어지는 달콤한 쉬는 시간을 처음 알게 된 날 가슴 뛰었던 놀라움도, 첫 참관 수업에 단 한 번도 손들어 발표하지 못한 속상함도, 백점 받은 시험지를 받아 들고 벌어지는 입을 감출 수 없던 기쁨도 우린 학교에서 배웠다.


충분히, 즐겁게, 잘 배웠다 생각한 어느 날, 왕따였던 엄마의 손을 잡고 용감 무상한 딸은 학교를  떠났다. 이제 우리만의 학교에서 우리라서 가능한 일들을 해보자 하며 하트 모양 은행나무에게 인사를 건넸다.


딸의 짧은 학창 시절이 끝났다. 2020년, 새파란 하늘이 아름답던 가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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