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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Sep 23. 2024

위대한 유산

대학시절,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우는 동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할머니가 보고 싶지? 아빠도 엄마도 아닌 할머니를 왜? 의아했다.

처음부터 할머니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이유를 불문하고 끌리는 핏줄이지 않은가? 할머니 사랑을 받고 싶어 사랑받을 짓만 했던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다.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할머니는 틈만 나면 할아버지 욕을 해댔다. 한평생 할아버지 덕에 보릿고개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던데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난 할아버지 허물을 끝없이 들춰내는 할머니를 견디기 힘들었다.



보고 배운 건 무의식에 담긴다. 술 주정뱅이 아버지 아래 성장한 아들이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술 주정뱅이가 되는 것처럼, 보고 배운 건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따라 하게 된다.


엄마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시작된 할아버지, 큰아버지, 큰어머니, 숙부와 숙모들에 대한 불만을 순서대로 열거하고 용돈을 두둑이 받고 나서야 집을 나서는 할머니를 반길리 만무했다. 이간질의 절대고수, 자식들 싸움 붙이기가 취미, 피해자 코스프레의 달인이었던 할머니의 피가 내 안에 흐른다는 것만으로 나는 나를 비난하고 타박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30년 가까이 겪었다. 할머니가 뱉은 말의 에너지가 얼마나 흉포했던지 얼마간 신경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서 할머니 그림자라도 보일라치면 엄마는 발길을 돌려버렸다. 그림자만 봐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했다.


엄마는 엄마도 모르게 아버지 흉허물을 들춰낸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아버지 없는 삶을 떠올리는 걸로도 눈물 흘리면서도, 엄마는 아버지 흉을 보곤 한다.

할머니만큼 심하지는 않대도 아버지의 흉허물을 뱉는 엄마를 볼 때면 숨이 막혔다. 나도 저러는 건 아닐까, 나도 내 딸에게 남편을 욕하고 있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터질 게 터졌다. 오전 내내 마당 단풍나무 가지 치기를 하고 나뭇가지와 잎을 정리하던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나를 시켜도 될 일인데, 딸자식 손에 가시라도 박힐까 도움을 요청하는 법이 없으니 먼발치에서 마음 졸였다.

일을 보고 귀가하는 엄마의 인기척에 쪼르르 마당으로 향했다. 아버지께 무어라 이야기하시다 나와 마주친 엄마는 그새 아버지 흉을 보는 게 아닌가. 손녀 앞에서는 천사처럼 웃는 엄마는 내겐 딴판의 얼굴을 보였다. 숨이 막혔다.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엄마도 그만하세요.” 날 선 말이 나갔다.

“아버지한테서 등 돌리자마자 왜 그러세요. 아버지 딴엔 오전 내내 힘들게 일하셨어요. 아버지한테 어떤 속상한 마음이 있었더래도 그러지 마세요.”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던 내가 던진 말은 엄마를 속상하게 했다. 서운함이 눈에 가득했다.

“얘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당황한 엄마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엄마, 잘한 건 잘했다, 고마운 건 고맙다로 끝내세요. 불만은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많이 생각해 보고 말해도 늦지 않아요. 그리고 엄마한텐 남편이지만 제겐 아버지잖아요. 제가 마음 아파하는 건 안 보이세요?”




후회했다. 그래도 그러지 말 걸. 엄마도 그러려고 한 건 아닐 텐데. 본 대로 겪은 대로 당신도 모르게 툭 나온 걸 가지고 너무 모질게 말했다.

“정아, 이거…”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볶음밥 볶는 데 쏟아붓는 중에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감자조림이 가득 담긴 유리그릇을 들고 현관에 들어선 엄마가 내 눈치를 살폈다. 엄마식의 사과이자 다짐인 걸 알았다.

‘미안해, 딸.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너만 보면 물색없이 네 아빠 흉을 보고 마네. 네가 늘 내 편에서 내 말을 잘 들어주니 내 남편이 네겐 아버지란 걸 자꾸 잊어버려. 엄마도 노력할게. 그러니 이거 먹고 화 풀어.’ 엄마 마음이 읽혔다.

“그렇잖아도 점심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잘 먹을게요 엄마.” 받아 든 그릇이 따뜻했다. 그제야 엄마 어깨에서 긴장이 내려갔다.

“미남아~, 할머니 따라가자!” 꼬리를 헬리콥터 날개처럼 돌리며 할머니 사랑을 갈구하는 반려견 미남이를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가벼웠다.



유산은 제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많은 돈을 물려주는 게 대수는 아니다. 말, 행동, 예의, 마음가짐, 삶에 대한 철학, 타인을 바라보는 눈, 자신을 사랑하는 법 등등, 더 귀한 것을 더 값지게 남겨야 한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걸 아이들에게 건네주어야 한다.

깨닫는 순간 인생의 물꼬는 방향을 바꾼다. 엄마가 어렵게 틀어준 인생의 물꼬가 감사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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