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모든 공교육을 마무리했다. 열다섯, 이른 나이에 자신의 계획대로 끝맺음은 한 후 대입을 준비하겠다는 딸을 우리 부부는 만류했다. 부모 그늘에서 무엇이나 해도 될 나이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라 일렀다.
부모의 한 마디에 웅크렸던 꿈이, 기대가 펼쳐졌는지 지난여름부터 하고 싶은 게 쏟아져 무더위를 정신없이 지났다. 그리고 가을, 바리스타 자격증 과정에 돌입했다. 커피를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혹시 모를 아르바이트 자리를 두고서 말이다.
학령기로 중 3, 열다섯이나 된 딸이니 혼자 기관에 가도 된다는 걸 안다. 그러기엔 내 불안이 요동치고, 그 핑계로 콧바람을 쐴 수 있어 동행하는 편이다. 딸이 수업받는 동안 나는 카페에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한 후 청소년수련원 1층 로비에 자리 잡고 앉아 10 대 아이들의 웃음을 배경 삼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날도 그랬다.
수업이 끝날 즈음이 되어 읽던 책을 접어 가방에 넣고 있는데 딸이 계단을 내려왔다. 혼자일 줄 알았더니 낯선 남학생이 함께였다. 뭐지?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여 심장을 두드렸지만 의연한 척, 모르는 아줌마인 척하고 있었다. 딸의 사생활을 지켜줘야 한다는 당위를 애써 끌어올렸다.
남 : 고등 검정고시 ㅇㅇ학교에서 치지 않았어요?
딸 : 네, 맞아요.
남 : 그때 제가 바로 뒤에 앉아 있었거든요
딸 : 아~ 그래요?
나: (저 애는 누구지? 친분을 쌓으려는 건가?)
남: 그때 보고 너무 기억에 남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도 보다니!! 진짜 반가웠어요.
딸 : 아, 하하하…
나 : (헐, 그때가 언젠데?!)
남 : 검정고시 점수는 잘 받았어요?
딸 : 아, 네, 뭐. 평균 90점은 넘었어요.
남 : 와!! 그럼 엄청 잘 본 거 아녜요?!
나 : (헉! 3모 6모도 아니고 검정고시인데?)
딸 :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 그런가요? 저는 좀…. 내년에 다시 치려고요.
남 : 그럼 여기(청소년수련원 꿈드림센터)에서 공부할 거예요?
딸 : 아뇨, 저는 혼자 공부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서요.
남 : 아… 여기서 공부하면 좋을 텐데….
딸 : ………
나 : (말을 끊어, 말아? 진심으로 끼어들고 싶다)
남 : 대학은 어디로 갈 거예요?
딸 : 대학이요? 음…. 저는 미국으로.. (아무 말 대잔치임에 틀림없다)
남 : (실망한 표정) 미국.. 이요? 흠….
나 : (네가 뭔데 실망인 거? 오늘 처음 보는 거잖아? 저 놈 뭐지? 왜 자꾸 따져 묻지?)
남 : 그런데 집은 어디예요? 어디 살아요?
나 : (왜? 어디 살면 뭐?! 알아서 뭐 하려고??)
딸 : (한참을 망설이다)ㅇㅇ동에 살아요.
남 : ㅇㅇ동 어디요?
딸 : 그냥 ㅇㅇ동이요.
남 : 주변에 특징적인 건물 없어요? 편의점이나 학교?
나 : (저 xx가!!! 지금 선 넘네? 진짜 끼어들까? 딸의 안색을 유심히 살핌)
딸 : 그런 거 없어요.
나 : (나이스!!)
남 : 아… 사실은 저도 같은 동네 살거든요. ㅇㅇ아파트 아시죠?
딸 : (당혹감에 놀라며 슬슬 내 동태를 살피기 시작) 그렇군요. 들어는 봤는데 어딘지 모르겠네요.
남 : 사실은 제가 검정고시 때 그쪽 보고 너무 제 스타일인 거예요. 그런데 오늘 만나게 된 게 …
나 : (게임 오버!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를 딸에게 보냄)
딸 : 저기.. 앉아계신 분이 제 엄마예요.
남 : (당혹, 놀람, 경직, 혼란) 아……..
“아까 걔 몇 살이야?” 버스에 올라 딸에게 물었다.
“열 아홉 살 이래. 고 3.”
“무어어어어??!!!!! 걔는 너 중 3인 거 알아?”
“응, 말했어. 자기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고 말 걸 때 알려줬어.”
“무어어어어어어어?!!! 그런데도 그런다고? 진짜 선 넘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곧 성인이고 난 미성년자인데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친하게 지내자고 말 거는 줄 알았는데, 사는 곳 묻고 자기 스타일이라고 하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 싶더라고.”
퇴근한 남편에게 있었던 일을 알렸다. 오랜만에 또래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구나 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듣던 남편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이런 미친 xx! xxx xxxxx xxxxxxxx!” 육두문자를 쓸 수 있는 남자였다. 울그락 불그락, 두 주먹을 불끈 쥔 남편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였다.
“그래서 내가 보디가드 하려고. 그 애 때문에 수업을 그만두긴 그렇고, 당분간 센 언니 포스로 강의실 앞을 지킬 거야. 아, 아이라인을 좀 치켜 그릴까? 스모키 화장도 하고? 가죽 옷 입기엔 아직 더운데, 청바지 하나를 좍좍 찢을까?”
수업 3일 째다.
열아홉 청춘의 눈은 여전히 딸을 따라 움직인다. 어제는 인스타 주소를 물었다던데, 공스타만 운영하는 딸은 단호히 ‘없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미련이 뚝뚝, 딸 주변을 얼쩡거리는 녀석 때문에 청소년수련원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글을 쓴다.
지금은 열아홉이지만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녀석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엿이나 먹어라! 그리고 그 입 다물어라!!
별첨.
나는 남자든 여자든 ‘제 스타일, 제 취향이라서요’라는 말은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 생각한다.
얼마나 자기 본위적인가? 사람을 상품화하는 것 같아 귀에 거슬린다. 책이나 드라마에서 이런 표현이 나와도 발끈하는 편이다. 그래서 당신이 상대 취향이 아니면 어쩔 거냐 불끈거린다.
당신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드릴 기회가 있을까요 등등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드러내는 게 옳다.
자신의 취향이기 위해 상대가 존재하는 건 아닐진대, 나의 취향이니 너도 동의하라는 무언의 압박, 나만 느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