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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기저비 Jan 11. 2022

내 생애 최고의 수학여행 2


평소보다 이른 기상 시간이었다. 몇 번의 수학여행을 경험해 보았지만 여느 때와 다른 하루를 앞둔 나는 긴장감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빨리 일어났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가벼운 몸 상태가 오늘 하루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일찍 일어난 김에 서둘러 학교로 향해 도착했을 땐 아직 출발 시간이 여유 있게 남아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설렌 마음에 이른 등교를 한 관광버스가 교문 밖 도로에 아이들을 태울 생각으로 신이 나 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기사님들의 음주 여부를 측정해야만 한다. 예전에는 경찰서에 협조 공문을 보내고 출발 시각에 맞춰 경찰들이 학교에 와 음주 측정을 해 주었으나, 최근에는 학교별로 음주 측정기를 구비하여 자체적으로 점검하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천안시에 초중고가 몇 개인데 이 많은 학교의 수학여행 날 음주측정을 경찰서에서 감당하겠는가. 또 보통 2박 3일의 일정에서 둘째 날, 셋째 날 아침의 음주 측정을 그 지역의 관할 경찰서에 협조 공문을 보내 이를 미리 준비하는 것도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다. 여러 학교의 단골 수학여행 숙소 근방에 위치한 경찰서들은 아침마다 음주 측정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음주 측정기는 이제 필수품이다.

어제 행정실에 요청한 음주 측정기를 가지고 실장님이 내려오셨다. 밖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에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시던 네 분 기사님은 남은 커피를 재빨리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순서를 정할 것도 없이 먼저 커피잔을 내려놓은 기사님부터 측정기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훅- 숨을 불어넣는다.

“통과, 통과”

실장님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번째 기사님이 통과하시고 줄줄이 두 번째, 세 번째 기사님도 이상 무! 마지막 한 분의 기사님을 남기고 나도 이제 슬슬 아이들을 데려올까 준비를 하려던 찰나였다.

"삐-, 삐-, 삐이이-.”

낯선 경고음이 내 발목을 잡았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곳에 모여있던 기사님, 교감선생님, 6학년 선생님, 행정실장님까지 모두 잠깐 동안 비디오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한 장면이 되었다.

“으잉? 다시 한번 해 볼까유?”

비디오의 플레이 버튼을 다시 누른 건 실장님이었다. 허나 실장님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측정기는 다시 번쩍번쩍 빨간 불을 켜며 삐삐삑 소리를 울린다.

“어제저녁에 약주 좀 하셨슈? 밤에 술 마시고 다음 날에 감지되는 경우도 많잖유.”

하는 실장님의 말에 기사님은 발끈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랬다간 회사에서 짤려요. 술은 무슨 술이여. 술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거 기계가 이상한 거 아녀요? 아! 다시 한번 해봐요! 나 참.”

“이상하네… 그럼 아까 불었던 기사님들도 다시 한번 불어볼까유? 어떤가 볼랑게.”

방금 전 초록불과 함께 실장님의 합격을 받았던 기사님들도 있는 힘껏 입바람을 불며 몇 번이고 음주 측정을 해 보았지만, 세 분의 초록 기사님과 한 분의 빨간 기사님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거 기계가 이상한 거 같은데. 제대로 확인해 봤나? 우리는 절대 술을 먹을 수가 없어.”

“이거 며칠 전에 3학년 체험학습 갈 때도 잘만 쓴 건디? 그럴리가 없는디. 산지 얼마 되지도 않은겨. 아, 그리구 다른 기사는 다 초록불 떴는데 한 명만 빨간불 뜬 것도 이상하잖유. 이상한디. 술을 먹었던 안 먹었던 음주가 떴는데 그냥 갈 순 없잔여. 거기 회사서 다른 기사분으로 바꿔줄 순 없슈?”

“아니, 내가 술을 안 먹었는데 무슨 소리야? 이거 말고 다른 기계로 측정해봐요. 내가 나오나! 다른 걸로 측정해보면 알 거 아니야!”

“이 계장, 주변에 다른 학교에 전화 좀 해볼텨? 측정기 빌릴 수 있는지?”

“아오, 나 참 별일을 다 당하네. 우리 회사에 다른 기사는 다 노는 줄 아남?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게 대체 뭔 경우야.”

기사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말이 날카로워졌다. 분위기는 점차 굳어져갔다.

수학여행 업무 담당자인 나는 쿵쾅쿵쾅 크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 수학여행 계획에 이런 시나리오는 머리속에 없었다.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무얼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이 멈췄다. 출발을 그냥 해도 되는지, 경찰을 불러야 하는지, 여행사에 기사를 교체해 달라고 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결정권자는 아니었다. 나는 초조하게 하릴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체크하며 손톱만 물어뜯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 하기만 몇십 분. 수학여행을 떠나는 6학년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중앙 현관에 나온 교장 선생님까지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결국 경찰을 호출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간이 측정기보다 보다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고, 불안하게 출발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확인하고 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경찰을 호출할 때, 우리는 이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근처 파출소에서 당장 나올 수 있는 경찰이 없어, 학교에서 거리가 있는 파출소에서부터 학교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십분, 십오 분 남짓의 그 시간 동안 내 속은 온갖 생각들이 엉클어져 어깨 근육과 함께 꽉 뭉쳐 있었다.

‘경찰이 측정했는데 음주가 나오면 어떡하지? 오늘 출발 못하는 거 아냐? 오늘 출발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늦게 출발하면 식당 시간 예약은 어떡하지? 미뤄야 하나? 지금? 아니면 가는 거 보면서? 다른 박물관 시간 예약한 건 없었나? 일정 소화 못하도 괜찮은 건가? 나중에 입장료 같은 거 돌려줘야 하는 건가? 아니 지금 이거 생각할 때가 아니지. 교실에 있는 애들은 괜찮은 건가? 교실에 아무도 없을 텐데, 또 별 일 생기는 건 아니겠지?’

나이트클럽의 싸이키 조명처럼 온갖 생각이 번쩍번쩍 나타났다, 사라지며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갖가지 걱정스러운 상황이 나를 괴롭혔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암담했다.

경찰이 도착하고 빨간 불 기사 아저씨는 다시 한번 음주 측정을 했다. 다행히 신호등의 빨간 불은 초록 불로 바뀌었고, 결과를 확인하신 실장님은 머쓱해하시며

“기계가 이상한가? 이게 충전이 잘 안돼서 그럴 수도 있을거여. 이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충전해서 써봐.”

하는 말을 나에게 남기고 재빨리 자리를 뜨셨다.

나는 엉클어진 마음을 애써 추스리며 차에 올라타 생각했다.

‘하… 이번 수학여행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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