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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y 03. 2024

김밥은 지옥이다

아무래도 천국은 아닌것 같은데

현장체험학습 전날 김밥 재료를 사기 위해 장을 봤다. 계속 되는 등교거부로 살얼음판 걷는 나날을 보내는 와중이었다. 특히나 아이는 현장체험학습인 소풍날 더더욱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이유는, 수업시간이 전혀 없고 바깥활동이 많은 행사날에는 더욱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힘들고, 겉도는 순간이 많아서이다.


소풍날 교외체험학습을 내고 학교를 보내지 말까 며칠을 고민했다. 결론은, 그냥 보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주에 여행이 있어서 며칠 쉴 계획인데 소풍날까지 빼버리면 너무 학교에 안 가는 날이 많았다. 어디 뚜렷하게 여행을 갈 목적도 아니고 그냥 가기 싫어서 학교를 안 가고 집에 있는걸 몇 번 해보니 별로였다. 아이 마음은 좀 편했을지 몰라도 그런 식으로 자꾸 쉬게 해주는것도 불성실한 학교 생활을 학습시켜주는 꼴 밖에 안되는것 같았다.


좀 외롭고, 힘들고, 피하고 싶더라도 그 시간을 참고 견뎌내는 것도 훈련이고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왠만하면 등교는 시키기로 했다. 남들은 다 소풍 전날이라 설레고 즐거울 때인데 아이에게는 무거운 짐을 드는것 마냥 부담스러움으로만 느끼고 있으니 김밥을 싸자고 장을 보낸 내 발걸음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도시락은 싸주어야지. 김밥으로. 유기농 식료품점에서 장을 봤다. 김밥을 별로 즐기지 않는 녀석을 위해 아이가 원하는 속재료 위주로만 샀다. 발달이 느려 구강 감각도 예민한 탓에 김밥이라는 재료가 풍부하게 들어간 음식은 여전히 씹기도 삼키기도 힘든 음식 중 하나다. 초1까지도 김밥을 거부했는데 최근에는 감사하게도 조금 먹기 시작했다.


김밥을 싸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평소보다 더 긴장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고 알람 소리가 나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새 밥으로 싸주어야할 것 같아서 쌀을 씻어 밥을 솥에 안치고, 속재료 준비를 하나씩 해나갔다. 계란을 풀어 지단을 만들고, 당근은 얇게 채썰어 볶고, 어묵도 살짝 익혀주고, 참치는 마요네즈랑 비벼서 섞고.. 시금치는 어제밤에 미리 무쳐놨는데도 할 일이 참 많다.


친한 엄마는 애들이 김밥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해준다던데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솟구친다. '그냥 간단하게 먹을려고 대충 말았어요.'라며 가끔 우리집에도 그 김밥을 가져다주곤 했는데 집김밥은 대충 만들었다해도 맛도 좋았다. 이게 정말 간단한 작업이란 말인가?


김과 밥 그리고 속재료까지 다 세팅을 하고 말 준비를 마치니 오롯이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때부터 부지런히 말기 시작했다. 김밥김이 10장 들어 있어서 딱 10줄이 나왔다. 천만다행으로 밥솥에 새로 한 밥이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저번에는 중간에 밥이 너무 부족해서 햇반을 동원해서 했는데.


SNS에 보면 다른 엄마들은 소세지 문어에, 메추가기 닭모양에, 달팽이 김밥에 화려한 도시락 비쥬얼을 자랑하던데 나는 똥손이라 여태 그런 멋진 도시락은 만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시도조차 못했다. 왜냐면 김밥 그 자체를 만드는것만 해도 어지간히 손이 많이 가서 힘들었다. 정말 요즘 엄마들 존경스럽다.


김밥을 다 만들고 나니 딱 한시간 삼십분이 지나 있었다. 이런, 롤샌드위치도 만들어야하는데, 나 아직 세수도 못했는데 이렇게 시간이 후딱 지나가다니. 도시락에 넣을 과일도 준비해야하는데 김밥 준비하느라 설거지거리는 넘쳐나고 바닥은 김가루에 참기름 흔적에 더러워지고.. 점점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온다.


재료도 그다지 실하지 않은 김밥 하나 완성하고 나니 에너지가 다 소진된 기분이다. 누가 김밥을 소풍의 시그니처 메뉴로 정한거야? 이거 일제시대의 산물 아니야? 좀 더 간단한 도시락 메뉴는 없느냐 이 말이다!


애가 주먹밥을 좋아하니까 주먹밥을 싸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죄다 김밥을 먹는데 혼자만 주먹밥을 먹는것도 모양새가 안 날것 같았다. 사실 김밥은 이런 소풍같은 빅이벤트가 아니면 일 년에 한 번도 쌀 일이 없기에 한 번쯤 싸주는 것도 엄마로서 충분히 해줄수 있는 일이다.


롤샌드위치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모양이 안 나는지, 만들고 나서 생각해보니 밀대로 식빵을 미는걸 깜빡했다. 모양이 영 엉성하다. 다시 해줄까 하다가 그냥 되는대로 도시락에 구겨 넣어주었다. 모양은 별로지만 재료는 유기농이라 좋을꺼야, 암 그렇고 말고.


이 허접한 소풍 도시락 하나 완성하는데 아침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겨우 아이를 등교시키고 부엌을 돌아보니 엉망진창이다. 설거지에 바닥 청소에 다 마무리 하고 나니 목이 너무 말라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간절하다. 시원한 아아 마시면서 갈증해소할 기대감에 열심히 뒷정리를 마쳤다.


누가 김밥천국이라 칭했나? 김밥은 결코 만들기 쉬운 음식이 아니다. 유독 요리잼병인 나만 그렇게 느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침일찍 일어나 큰 일 하나 마쳤다는 뿌듯함과 아이가 크게 거부하지 않고 등교해주었다는 흐뭇함에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룰루랄라 아아를 마시려고 집앞 카페로 나섰다.



앱으로 미리 주문하고 간 커피숍에는 왠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덩그러니 준비 되어 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주문 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핫으로 주문들어와있던데요."


"..."



그렇다. 정말로 내 손으로 핫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두었다. 이 타는 목마름을 어쩌라고.. 아침부터 고생한 나를 위해서 시원한 아아 한 잔을 보상해주려 했는데, 망했다. 왠지 한 잔 더 주문하자니 너무 아깝기도 하고 억울해서 뜨겁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좀 더 정확하게 주문하지 않은 나 자신을 원망하며 돌아왔다.


이 타는 목마름을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김밥 꽁다리로 풀어내야지 어쩌겠어.


소풍 간 아이에게만은 김밥이 천국의 맛으로 느껴지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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