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 엄마가 바라보는 세상
요즘 초등4학년생치고 아이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는 편이 아니다. 초1때부터 하던 학습지가 애한테 시키는 학습의 거의 전부라고 봐도 된다. 영,수학원은 전혀 보내지 않는다. 아니 엄두도 못내는 편이 더 맞다.
아이의 집중력은 학교에서 다 소진되어서 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 학원 수업을 소화할만큼의 주의집중력과 인내심같은게 한없이 부족하다는 객관적인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다. 하고 있는 사교육이라고는 센터수업과 예체능학원 위주다. 나도 부모인지라 더 시키고 싶은 마음은 그득하고 한번씩 욱하고 올라올 때가 있지만 겨우 마음을 다잡곤 한다. 지금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건 또래보다 느렸던 전두엽의 성장, 대소근육 발달 등이다.
학습지 수학문제를 하루에 10분정도 푸는데 그것도 옆에서 끼고 봐주지 않는다. 혼자 풀도록 내버려두는 편이다. 공부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곧잘 스스로 하는
편이긴 하다. 단 두세장 푸는거지만 그것만이라도 꾸준히 하니 다행이고 기특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전 아이가 수학문제 푸는걸 우연히 보다가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혼자 문제를 열심히 풀더니, 뭔가 어려운 문항이 나온듯 했다. 갑자기 눈빛이 흔들리면서 불안한 기색이 엿보인다. 확실히 어렵게 느껴진 모양이다.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해서 아이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잠깐 문제를 보고 깊이 생각하는가...싶더니, 아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그리고 많이 해본듯한 능숙한 자태로 맨뒷장의 답안지를 조용히 훑어보더니 그대로 베껴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빵 터지고 말았다.
아이에 대한 실망감도 좌절도 전혀 없었다. 정말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요새는 예능을 봐도 그렇게까지 웃음이 터져나온 적이 없는데 그냥 너무 웃겼다.
왜 웃겼냐면, 내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것 같아서다. 나도 어렸을 때 혼자 문제집을 풀다가 잘 모르겠으면 조용히 답안지를 훑곤 했다. 물론 답안지가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답안지가 있는 문제지나 숙제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정답을 미리 봐버렸다. 괜찮아, 해설을 잘 읽어보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아주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답안지를 보곤 했다.
참을성이 없고 스스로 깊게 생각해서 답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아서 내가 최상위권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땐 답안지의 유혹을 떨쳐내기에는 너무 어렸고 인내심도 바닥이었다.
그러했던 내 어릴 적 모습을 내 아이가 내 두 눈앞에서 재연하는걸 보고, 그 시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는가 싶어서 너무 웃겼던거다.
처음에 들켜서 약간 멋쩍어 하던 아이는 내가 너무 웃으니까 자기도 덩달아 같이 웃고 있는다. 엄마가 왜 빵 터졌는지도 모르면서 너무 웃으니까 그냥 따라웃는거다. 그게 또 웃겨서 같이 눈물흘리면서 실컷 웃었다.
씻고 나온 남편이 우리 둘이 엉겨서 이렇게 웃는걸 보더니 이건 무슨 장면인가 궁금해한다.
답을 보는건 금기시되어야하고, 스스로 생각해서 끝까지 고민해보고 푸는게 맞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겐 너무나 큰 과제일 수도 있다. 나도 그랬다. 요즘 유행하는 사고력을 강조하는 수학 학원들은 저마다 절대 답을 보여주지 않고 몇 시간이 걸려도 끝까지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강조한다고 하는데, 나도 그런 학원에 다녔으면 수학을 좀 더 잘했을까 궁금하기는 하다.
내 아이도 그렇게 시켜야 사고력이 좀 발달할까나.
그 후로는 조용히 답안지를 찢어서 따로 보관하고 스스로 풀어보도록한다. 그래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 나오면 멘탈관리 못하고 짜증내거나 화를 내거나 그냥 별표 쳐놓고 포기해버린다. 생각 좀 해보고 넘어가라고 잔소리는 하지만 너무 많이 하지는 않는다. 나는 애를 이해하니까.
내가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 너무 강요하지는 말아야겠다. 나도 똑바로 정석으로 못해놓구선 애한테 무슨 잔소리할 자격이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발전을 위해서 조금은 스스로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질 수 있게 티 안나게 조금씩 가르쳐봐야겠다. 그게 잘못된 방식이란걸 나는 경험을 통해 아니까, 아이가 나쁜 습관으로 고착시키기 전에 도와주는게 내 임무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