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들레씨 Apr 19. 2023

나의 뒷동산-2

무덤과 쑥


 이제 뒷동산에 올라가 볼까? 뒷동산의 초입길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처음 이 오르막 길을 오를 땐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가팔랐다.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들면 갈 길은 저만치다. 차오르지도 않은 숨을 크게 내쉰다. 한숨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몇 걸음 걷다가 올려다보길 반복하면서 유난스럽게 오른다.



그다음부터는 나름 요령을 터득한 것 같다. 오르막길을 보면서 걸으면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만 보며 내리 오른다. 그럼 어느새 평지가 보였다. 발끝만 보고 걷는 것은 고통을 덜 느끼고 싶은 나의 작은 속임수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몸도 마음도 말랑말랑했던 과거와 달리 그저 담담하게 오른다.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들이 덜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번민이 가득한 중생처럼.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가 소중해서 그 안에서 느끼는 모든 감각에 집중하려 애쓴다. 그러다 보면 지나가는 청설모와 눈이 마주치는 찰나도 있다. 뒷동산이 품은 뜻밖의 작은 역동과 변화에 늘 감동하곤 한다.



그렇게 나는 오르막 길을 오르며 과거와 현재의 나를 비춰본다. 그럼 속으로 '나 많이 자랐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변함없는 뒷동산은 켜켜이 쌓아 온 나의 과거와 현재를 있는 그대로 품어준다. 내가 자라든 말든 상관없이. 그럼 난 뒷동산에 담긴 과거와 현재, 수많은 장면 중 하나의 테이프를 골라 감상에 젖은 채 걷는다. 그럼 꼭 내 모든 것을 아는 친구와 함께 산행하는 듯하다. 








오르막 길을 지나 평지에 다다르면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선택해야 한다. 왼쪽 길은 완만해서 둘러보며 걷기 좋고 오른쪽 길은 가파르고 울창한 숲 길이다. 나는 둘러 둘러 천천히 가는 것을 좋아해 대체로 완만한 왼쪽 길을 택한다. 완만한 평지를 걷다 보면 통나무 계단이 나온다. 통나무 계단만 지나면 그다음 산행은 수월해진다. 그러니 통나무 계단에서 조금 더 힘을 내본다. 통나무 계단까지 오르고 나면 다시 평지다. 그럼 나무틈 사이로 마을을 내려다보며 쉴 수 있는 벤치와 그 맞은편 잘 관리된 무덤을 볼 수 있다. 



뒷동산 산행로는 무덤과 벤치가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곳곳에 있다. 이제는 산행로 곁에 무덤이 있다는 사실이 익숙해져 처음 느꼈던 이질감은 사라졌다. 나는 이 무덤을 지날 때면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이맘때 그 무덤 주위엔 유난히 쑥이 많이 자랐다. 엄마는 하나에 꽂히면 몰입을 너머 굉장한 집착을 보여주곤 했는데, 그때 엄마에게 꽂힌 건 쑥이었다. 엄마 눈엔 쑥밖에 안 보이는 듯했다. 뒷동산에 갈 때 큰 봉지와 작은 칼을 챙겨 쑥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그 무덤 주위에 쑥이 많다는 걸 알았을 땐 반나절을 그곳에서 쑥을 캤다. 나에게 또다시 지루한 노동 현장이 시작되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엄마는 쑥을 캐는 것에 엄청난 몰입을 보였고 힘든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투덜거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묵묵히 있었던 건 엄마가 아파 보이지 않아서였다. 엄마는 항암치료 중이셨는데, 이날 쑥을 캐는 엄마의 모습은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날 엄마가 신나게 쑥을 캐며 아빠에 관한 험담을 할 땐, 엄마는 절대 여기서 더 아플 사람이 아니라며, 다시 건강을 되찾을 거라고 나는 큰 소리로 장담했다. 그렇게 나는 태연한 척 엄마를 평소처럼 대했고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과 슬픈 기색은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한창 쑥을 캐다가 엄마랑 무덤 옆 벤치에 앉아 쉬었다. 그때 엄마는 불쑥 무덤에게 말을 건넸다. 


"참 좋은 자리에 누우셨네요. 편안하시겠어요."



나는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고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엄마는 왜인지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분명 엄마는 건강을 위해 매일 산을 오르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농담이길 바랬지만 평소 엄마가 농담을 할 때 보이는 특유의 익살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해 봄, 엄마랑 내가 캔 쑥으로 쑥개떡을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쑥이 들어갔는지 일반 쑥개떡 보다 색이 진했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쑥개떡이었다. 그걸 냉동고에 채워두고 야금야금 꺼내 먹었다. 쪄서 꿀에 찍어 먹기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눌러먹기도 했다. 고소함과 더불어 쑥향이 진하게 느껴지던 맛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사실 20대 초반의 내가 좋아할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의 엄청난 정성이 담긴 쑥개떡이라는 것을 알기에 맛있게 먹는 척을 했다. 그 쑥개떡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을 만큼 냉동고에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생각날 때는 없었다.



지금은 입맛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인지는 몰라도 이맘때면 엄마가 해주던 쑥개떡이 자주 생각이 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지나가는 길 떡집에 들린다. 매대엔 색감이 이쁘고 달달해 보이는 떡들이 시선을 붙잡지만,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떡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쑥개떡을 집어 든다. 대충 둥글고 넙데데한 그 투박한 자태가 반갑지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만큼의 진한 쑥향은 아니다. 그런대로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어느 날, 다시 그 무덤이 있던 자리에 갔을 땐 또 다른 누군가가 쑥을 캐고 있었다. 엄마랑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믿었던 자리에서 마치 연출 같은 어떤 이의 뒷모습을 보니 엄마와 나의 추억이 담긴 테이프가 생생하게 재생된다.



그렇게 또다시 그리움이 몰려올 때면,


그때 그 무덤이.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뒷동산이 '우리가 다 알고 있어.' 라며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뒷동산-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