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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유럽 하늘에서 새겨넣은 괴테의 문장들

by 은하수반짝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옆 좌석에서 새근새근 자는 아이들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나 역시 유럽을 쉬이 떠나보내기 싫었다. 수첩을 꺼내 이번 여행 중 문득 떠올리며 곱씹었던 괴테의 문장, 세 개를 끄적였다.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말했다. 이는 《파우스트》 초반, 파우스트를 시험하겠다는 악마에게 하느님이 던진 말이다.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꿈꾸는 사람은 분명 노력을 한다. 그리고 틀림없이 문제는 생겨나고 인간은 여지없이 허둥대며 속앓이를 한다. 아무것도 안 하면 조용하게 살 텐데, 굳이 사고를 치고 만다. 그것도 매번, 그렇게 당하고도 말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욕망하고, 욕망했기에 대가를 치르며 성장하는 것, 황홀한 성장통이리라.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땀나게 걸어서 발바닥 물집은 아물 틈이 없었고, 아이들은 줄줄이 모자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 내가 브란덴부르크 문에 정신이 팔려 꽈당 넘어지는 바람에 내 최신형 휴대폰의 액정이 와자작 박살났다. 속이 무척 쓰렸지만 어쩌랴. 다시 생각한다. 그렇다면 휴대폰 액정이 매끈하게 반짝이길 원하는가? 아니면 평생 빛날 보석같은 장면들을 원할 텐가? 내게는 방황을 위해 치른 대가보다 큰 것은 함께한 추억 그리고 성숙과 깨달음이 분명했다.

또 괴테는 《파우스트》 중반에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뮌헨 레지덴트의 황금홀, 빈 쇤브룬 궁전, 프라하 성비투스 성당과 쾰른 대성당까지 인간의 생은 유한해도 장인들이 남긴 예술은 세기를 넘어 가슴을 울렸다.


인생은 짧고 분명 끝이 난다. 루트비히 2세의 무덤 앞에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차가운 돌기둥 사이에서, 모차르트와 시시 황후의 흔적 앞에서 또 체코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나는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로마의 개선식에서 한 장군이 화려한 꽃잎과 환호 속에 걸어가는데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예가 장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는 그 말이다. “당신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존재임을 기억하라.”

뮌헨의 성 미하엘 교회, 바이에른 왕가의 무덤

유럽 성당 곳곳에는 왕과 성인들이 잠든 관이 놓여 있었다. 독일에 막 도착해서 봤던 루트비히 2세의 회색빛 대리석 관을 잊을 수 없다. 어두운 계단을 따라 지하에 갔고, 낮은 천장 아래 바이에른 왕족들의 관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화려한 생을 살았던 이들이 결국 한 칸의 관 속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묘한 슬픔을 일으키며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뼛속 깊이 내려앉았다.

온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멋진 성(디즈니성이라 불리는 노이슈반스타인성)을 지은 왕이 왜 이렇게 좁고 어두운 곳에 있느냐고 물었다. 성 하나를 세울 만큼 거대한 꿈을 꾸었지만, 남은 것은 차가운 석관 하나, 그 위에는 생전의 왕관만이 조용히 올려져 있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 숨 가쁘게 달리고 있느냐고.” 난 여행 내내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다니며 인생과 삶의 의미를 곱씹곤 했다.


괴테는 ‘짧은 인생’ 뒤에 ‘긴 예술’을 연결했다. 헛된 삶을 살지 않으려면 예술을 해야한다는 뜻일까? 어쩌면 괴테가 말한 예술은 캔버스나 대리석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살아낸 삶 자체였을 것이다.

이제 곧 강인공지능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변할 것이다. 기성 세대는 그나마 괜찮다. 이미 직장이 있고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갖췄으니까, 인공지능 로봇이 아무리 판을 쳐도 최소한의 인간 고유의 검증과 손길은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새로워진 세상, 로봇이 대부분의 일과 사고를 처리하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예술을 해야 할까? 지금처럼 문제집을 한껏 풀고 암기해서 좋은 대학을 가면 진짜 될 일일까? 10년 후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인공지능 로봇에게 치여 자기만의 예술을 배우고 실무를 익힐 기회조차 박탈당하지 않을까?


대체되지 않을 고유한 흥미와 재능을 찾아야 한다. 꾸준히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만의 예술을 펼쳐내야 한다. 그렇게 대체되지 않은 나여야, 짧은 인생이 의미있는 예술로 남을 것이다. 그건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고유한 자신의 빛을 알고 그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 받은 인생이니까. 역시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오늘을 진심으로 사는 일이 맞다.


곱씹었던 마지막 문장은 파우스트가 죽음을 각오하고 외친 “행복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이다. 사랑과 명예, 부까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만족하지 못했던 파우스트는 자유로운 땅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간척 사업을 벌이는 중에 진짜 행복을 느낀다. 악마는 가장 공허한 순간이라 조롱했던, 너무 맑아서 붕 뜬 것만 같은 그 선의의 순간에 말이다.


신기하게도 세상 유명한 많은 이들이 같은 말을 했다. 모든 부와 명예는 물론 천 명의 후궁을 거느렸던 솔로몬은 《잠언》에서 “헛되고 헛되다. 사람이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로다.”라고 말했다. 헤르만 헤세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소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는 최고의 명예를 내려놓고, 결국 한 소년의 스승이 되었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과 철학, 화려한 예술이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삶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공자가 말한 ‘인(仁)의 어짊’도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리라. 특히 자기다움을 생명처럼 좇았던 헤세가 말년에 내린 결론이기에 내게는 더 큰 울림이 됐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행복보다 복된 삶’에 있다는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니던가.(덕분에 난 명예퇴직 신청서류를 출력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변할 미래에는 변하지 않을 그것에 초점을 둬야 한다.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질고 선한 마음과 공감력 그리고 창의력까지. 부모가 잘 공감해주고, 아이가 즐겁게 공부하는 것 즉 ‘공잘공즐’이 널리 퍼져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공감력과 창의력 또 자기주도성을 기르는 개성있는 전문가들이 되길 소망한다. 진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여행, ‘공잘공즐’은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캐리어 속, 비워낸 햇반 자리에 밥알처럼 뽀얗고 구수하게 들어찬 깨달음과 추억들이 포슬포슬 쌓여 있었다. 비워냈기에 가능했던 이 순간이야말로, 행복의 절정이었다.


* <가방엔 햇반, 마음엔 괴테>를 품고 다듬은 길 위에, 독자님들의 눈길과 관심이 함께 있었기에 35편의 에세이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며 응원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의 하루에도 따스한 여행의 빛이 매일매일 스미기를 바랍니다.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 공잘공즐 발걸음
햇반 대신 담아온 전리품들 그리고 함께했던 활동지, 공잘공즐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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