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ynameisanger Mar 19. 2024

비타민 B가 문제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 죄책감에는 실체가 없었다. 기억해 내야만 하는 자리였다. 내 수준에는 상당히 부담되는 비용을 내고 산 시간이었다. 어떻게든 말해야 했다. 노출해야 치료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텅 비어있었다. 이미 색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고통만 덕지덕지한 감촉으로 붙어있었지만. 아래를 쳐다봤지만 자신감 없는 내 손바닥만 보였다. 떨었다. 어쩔 수 없이 고했다. 생각이 잘 안 나요. 그리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련의 행동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겠지. 자신감 없는 태도. 힘없는 목소리. 눈을 마주보지도 못하는 행동. 그때 상담사의 반응이 어땠더라. 물론 상담사는 훈련받은 지난날을 발휘해서 표정이나 몸짓언어를 제어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한심하게 기억했다. 왜 내가 당한 것을 내가 기억하지 못해? 정말 당한 거 맞아? 혹시 네가 멋대로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 거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야? 

물론 트라우마 관련 서적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뉘앙스의 문장이 몇 번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내 죄책감을 좀 덜어준 것은 루크 에이킨스의 혈액이다. 루크 에이킨스는 미국인 스카이다이버인데 2016년 7월 31일에 낙하산 없이 스카이다이빙을 한 사람이다. 낙하산이 없는 대신 가로세로 30미터 넓이의 그물로 떨어지는 걸 계획했고, 지상에서 8킬로미터 시점에서 낙하를 시도했다. 다행히도 성공했는데 그 직후 그의 혈액을 검사해 보니 비타민 B가 깔끔하게 사라져있었다고 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비타민 B군이 전부 소모되어 버린 거다. 그리고 비타민 B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없으면 우울감, 불안을 겪을 수도 있고 명료한 정신을 유지하거나 기억을 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스카이다이빙을 한건 아니지만 아버지의 손에 의해 하루에도 여러 번 땅으로 자유낙하를 했으니 비타민 B의 소모가 극심했겠지.  

작가의 이전글 최하위권,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