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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Apr 09. 2024

정장과 시간여행

시간여행이다.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게 지금은 이해가 간다. 그때는 눈앞에서 보고도 놓쳤던 것을, 지금은 유추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그 이십 대 초반들 말이다. 그들은 나까지 포함해 네 명이었다. 셋 다 옷에 집착했다. 주로 세미 정장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무심했다. 함께 쇼핑몰에 가서 후드를 눈길을 주고 있는 나를 보고 뭘 모르는군,이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옷에 대한 집착과 나의 옷에 대한 무관심은 서로를 멀리 밀어냈다.


옷이 싫었다. 감정의 근원까지 내려가보면 여우의 신포도였던 것 같다. 나의 생물학적인 어머니인 그 여자는 내게 옷을 사준 적이 없었다. 가난해서도, 시대적 배경 때문도 아니었다. 옷이란 오래 입으면 색감이 바랜다. 나이 들면 골병드는 것처럼 표정이 썩 밝지가 않다. 단추가 떨어지거나, 접합부가 떨어져 나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옷이 얼마나 살았는지. 내가 입었던 옷들은 그렇게 수명이 다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나를 피했다.


생물학적으로 어머니였던 여자는 나보다 세 살 많은 다른 자식에게는 틈만 나면 옷을 사줬다. 둘은 죽이 잘 맞아 주말마다 새 옷을 사러 다녔다. 물론 난 한 번도 끼워 준 적이 없다. 새로운 옷에 담겨 온 설렘, 기쁨, 갓 프린트된 듯한 반듯한 박스로 표출되는 보란 듯한 뿌듯함, 자랑스러움, 그런 게 주어진 적이 없다. 부럽기도 했지만 내겐 기회가 없었다. 기대하다가 포기했다. 그래서 옷을 싫어하게 된 게 아닐까, 그때의 내 심정을 짐작한다. 이후에는 무관심하다 못해, 옷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가졌다. 사람의 내면이 아닌 겉모습에마 집중하는 얄팍한 인격의 반영이라는 식으로.


나는 옷의 힘을 몰랐다. 


최근 들어서야,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더 이상 젊음과 옷이 만나 발생하는 상당한 후광 효과를 누릴 수 있는 나이가 지나서야 나는 옷의 장점을 알았다. 정장의 매력, 사람의 영향력을 바꿔 놓는 옷의 힘 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정장을 입고, 그 뛰어난 가성비를 체감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을 사방에서 쥐어짜내 줬다.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정장을 봤다. 그들은 길을 비켜줬고, 미소를 지어줬으며, 이유 없이 신뢰해 줬다. 신기했다. 거의 다른 삶을 사는 수준이었다. 중고거래를 하러 갈 때 정장을 입고 갔더니 상대방은 돈을 이체받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이체 해주실 거죠?'라는 말만 남기고. 추리닝 슬리퍼 후드로 나갔을 때는 그러기는커녕 사람들은 돈을 정확히 받고도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거리에서 시비 붙는 일이 줄었고, 물건을 안 사고 가게를 나와도 공손한 인사를 받았다. 업무 관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자 이전과 달리 훨씬 잡음 없이 프로젝트가 굴러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내가 외모지상주의적이고 얄팍한 인간들을 개탄하면서 원래의 복장으로 돌아갔느냐 하면 그럴 리가. 인간은 편리함의 노예. 어딜 가나 사건들이 쉽게 풀리고 오해받을 일이 적어진다는 걸 깨닫고 그야말로 동네 마실 나갈 때마저 최소 세미 정장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패션 센스가 있었다면 캐주얼도 좀 샀을 텐데, 옷 고르는 감각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다. 정장은 패션 센스가 좀 없어도 된다. 색 고르는 감각이 떨어지는 것도 해결된다. 모든 걸 무채색으로 맞추면 된다. 


그리고 지난 일들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날 내쫓아낸 그 사장은 내가 서너 벌 밖에 안되는 색감이 닳은 캐주얼 남방만 주구장창 돌려 입는 게 맘에 안 들어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경력자인 나를 버리고 신입을 들인다는 건 경영에서 비효율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체당했을 때 얼핏 본 신입은 짙은 네이비색 코트에 갓 구매한 새하얀 셔츠를 깨끗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그 전에 글쟁이 모임에서도 쫓겨난 적 있는데 나를 쫓아내는 것을 주도한 남자는 패션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 정장을 주로 입었는데 지금의 나처럼 간신히 무채색으로 구색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입었다. 그가 어두운 귤색 체크 무늬의 발목까지 오는 정장 바지에 날렵한 조끼를 입어서 어딘가 제비 같이 느껴졌던 날이 기억난다. 나는 그때도 후줄근하게 입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나를 모임에서 쫓아냈었다. 뭐, 혼자서는 아니고 그와 비슷하게 어여쁘게 차려입은 여자친구와 함께 그런 거지만.


이십 대 초반의 그들은 쇼핑몰에서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쫓기는 것같았다. 몇 시간이고 이 매장 저 매장을 다니면서 필사적으로 나를 돋보이게 해줄 만한 옷을 끝없이 찾는 건 좀 이상하다. 이십 대 초반.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쉬운 나이. 그리고 정장을 입었을 때의 달라지는 대접에 알게 된 옷의 힘. 약한 사회적 기반. 서로의 옷을 봐주면서 그런 것들을 무언으로 공감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사건도 달리 보인다. 단 한 번도 옷을 나와 함께 사러 가지 않은 그 여자 말이다. 그 여자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됐었다. '엄마 아빠랑 함께 옷 사러 갈때의 지루함 말이야'라고 하고 모임의 누군가가 말을 꺼내고, 그 자리의 모두가 깔깔 웃었을 때였다. 나는 웃지 못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므로. 그게 뭐야,라고 묻다가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상상했다. 친근한 누군가가 이 옷이 너에게 어울린다면서 입어보라고 권유하는 걸까? 그 행동의 의미는 '아무도 너를 깔보지 못하도록 옷이라는 현대판 갑옷을 갖추고 다니렴 내 소중한 아이야.' 인 걸까. 그리고 그 여자는 내게 그렇게까지 해줄 만큼의 애정은 없었던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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