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파이프 PIPE K Jul 12. 2023

6. 성혜나와의 인터뷰

'명랑한 척'을 하면, 정말로 명랑해질 수 있을까?

-


"불행하면, 불행하게 사는 것도 방법이에요. 불행하면서도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인정하는 거죠. 하지만 자신의 불행을 충분히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면, 유쾌해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명랑해지는 첫 번째 방법은, 명랑한 척을 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저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들어요. 유쾌해지고 싶다면 그냥, 유쾌한 척을 해 보는 거에요."


-


  영어권에는 "It never rains but it pours."라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비는 한번 내렸다 하면 쏟아 붓는다."라는 의미인데, '불행은 반드시 한꺼번에 겹쳐서 일어난다'는 다소 비관적인 속뜻을 담고 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The Blue Castle"이라는 소설이나 리처드 애덤스의 "Watership Down"이라는 소설에서 주요하게 인용되고 퀸의 "Under Pressure"에서 "These are the days it never rains but it pours. (비가 내렸다 하면 쏟아 붓는 나날들이야.)"라는 형태로 활용되기도 한 이 속담은, 매정한 현실의 진리를 함의하고 있기도 하지만 한바탕 비가 내린 후에야 날이 갠다는 막연한 희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인생의 많은 굴곡을 겪은 후 30대가 되어 다시 대학의 품으로 돌아온 '성혜나'와 처음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날, 나는 그가 "It never rains but it pours."라는 말과 참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은 불공정한 것이고 자신은 언제나 바닥으로 추락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는 뿌리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지만, 자신의 과거를 예사스레 풀어놓는 그의 눈빛에서만큼은 그 모든 슬픔을 압도하는 강렬한 삶의 에너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화하는 내내 함께 비를 맞는 기분이 들었던 성혜나와의 네 번째 인터뷰를, 지금부터 찬찬히 되짚어 보려고 한다.




K 인생의 목표가 있나요?

성혜나 여러 가지 목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제 아이를 낳는 거에요.

K 아이를 낳고 싶은 이유는 뭔가요?

성혜나 저는, 저를 닮은 딸을 낳아서 방임하며 자유롭게 키우고 싶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랐고, 그 과정에서 정서적인 학대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 딸은 그런 스트레스 없이 크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하게 되네요.

K 정서적 학대와 어린 시절의 스트레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성혜나 저는 커 가면서 부모님이 돈 때문에 싸우는 걸 너무 많이 봤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저에게 하소연을 했고, 제가 첫째니까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도 많이 주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너희를 위해 불쌍하게 살고 있다.' 같은 말들도 들었고요. 나중에는 부모님이 근원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왜 너희를 키워야 하느냐' 같은. 요즘은 그래도 할 말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어린 시절에 받았던 정서적 상처가 잘 회복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K 본인의 아이를 어떤 식으로 키우고 싶은지에 대한 방향성이 있는 건가요?

성혜나 나의 부모님이 나를 키웠던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키우고 싶어요. 아이에게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고, 아이의 적성에 맞는 것들을 찾아주고 싶어요. 저는 부모님의 히든 카드처럼 커 왔거든요. 저는 가끔씩 잠에 들기 전에 여섯 살의 나를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그 아이한테 미안하다는 마음도 들고, 용케 살아 있다는 대견함도 들어요.




  모든 사람들의 정서적인 구조는 대체로 어린 시절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고, 그 경험은 대부분 의식의 깊은 저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기의 트라우마는 의식의 여러 층위에 남아서 평생에 걸쳐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며, 소년기의 좌절된 욕구들은 인생의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왜곡된 형태로 발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마주하고 되짚어 보려는 시도는 자신의 현재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혜나가 들려준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은 그의 의식 속에 꽤나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스트레스'와 '정서적 학대'로 남은 부모와의 기억들을 회피하지 않으려고 했다. 대신 그는 그러한 기억들을 아이를 낳고 싶다는 자신의 목표, 즉 하나의 도달점으로 승화시킨다. 자신의 아이를 자신이 커 온 방식과는 정반대로 키우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그래서인지, 부모님의 '히든 카드'로 자랐던 모든 아이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잠에 들기 전에 어린 시절의 자신과 눈을 마주보고 지금까지 잘 버텨 준 그 아이에게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네는 혜나의 모습은,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곤 하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자신에게 필요한 위로가 무엇인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법이다.




K 20대 시절을 되돌아봤을 때 스스로 가장 잘 했다, 라고 느껴지는 건 무엇인가요?

성혜나 뭐든지 열심히 했던 거요. 사소한 거라도 대충 하지 않았던 태도. 저는 정말 뭐든지 다 열심히 했어요. 화장품도 열심히 팔았고, 치과 바닥도 열심히 닦았고, 편의점 담배 종류도 기가 막히게 외웠어요. 그런 태도들이 이어져서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K 무엇이든 다 열심히 했던 경험들이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적이 있었나요?

성혜나 저는 대학에 돌아온 지금이 제 인생의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공부하는 순간들이 즐겁고, 감사하고. 그런데 제가 다시 대학을 올 수 있었던 건, 뭐든지 열심히 하는 습관 때문이었어요. 처음에 제가 동네 보습학원에서 수업을 맡았을 때, 초등학생 두 명을 가르쳤어요. 대충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수업을 열심히 준비했고, 또 열심히 가르쳤어요. 그러다 보니 다음에는 중학생들을, 그 다음에는 고등학생들을, 결국에는 특목고생들을 학원에서 맡기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영어 공부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따로 공부하지 않고도 편입 시험을 붙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던 거죠. 인생은 운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머지는 태도고. 우리는 물론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만, 인생은 절대 공정해질 수 없어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공정하지 않아요.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 같아요. 불공정을 내버려두자는 건 아닙니다.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은 극복해야죠.




  어린 시절, 때 이른 좌절들을 겪으면서 성장했던 혜나가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길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기' 였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했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연들과 최대한 많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으며 대학을 다니면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무엇이든 열심히 공부했다고 회상한다. 그가 이러한 삶을 살았던 것은, 어떤 가시적인 결과를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절박하게 살아 내려고 했을 뿐이고 그 길에 놓인 유일한 선택지, 그러니까 '무엇이든 열심히 하기'를 충실하게 해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그가 대학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혜나는 자신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맞게 되는 모든 결과들은 우리의 사소한 선택들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지는 강력한 필연들이다. 따라서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식의 이야기는 단순히 성공한 사람들의 거만한 무용담이 아니다. 기회를 향한 다양한 필연의 경로들을 개척해 둔 사람들에게 더 큰 성취의 가능성이 펼쳐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진실이다. 인생의 태생적인 불공정함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만이 우리의 눈앞에 남게 된다. 바로 그것들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 그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다.




K 세상에는 자신의 불행을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말들을 해줄 수 있을까요?

성혜나 불행하면, 불행하게 사는 것도 방법이에요. 불행하면서도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인정하는 거죠. 하지만 자신의 불행을 충분히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면, 유쾌해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명랑해지는 첫 번째 방법은, 명랑한 척을 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저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들어요. 유쾌해지고 싶다면 그냥, 유쾌한 척을 해 보는 거에요.

K 명랑한 척을 하면, 정말 명랑해지나요?

성혜나 어느 정도는요? 사실 제가 정신과를 다닌 지 조금 오래되었는데요,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그건 바로, 기분이라는 것은 호르몬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에요. 살아가면서 무기력하고, 힘들고, 우울하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그 기분을 바꿀 수 있는 여력이 자신에게 남아 있다면, 그 기분 속으로 들어가 숨지 말고 명랑한 척을 해 보는 거에요. 그러다 보면 자꾸 웃게 되고, 또 말을 하게 돼요. 명랑한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나는 왜 살고 있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에요. 그런 생각의 결론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자신의 불행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불행을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허무감과 패배주의에 굴복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삶을 변화시킬 심리적 기반을 다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즉,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외려 유쾌해질 일만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불행이란 절대적인 삶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몰두해 있는 기분일 뿐이고, 기분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호르몬의 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행을 유쾌함으로 바꾸고 싶다면, 스스로가 유쾌하다고 믿으면 된다. '명랑해지는 첫 번째 방법은, 명랑한 척을 하는 것이다.' 라는 간단한 문장 속에 담겨 있는 생의 비밀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우울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묻혀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실은 실체 없는 호르몬의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온전히 마음가짐의 영역이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라는 대책없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바깥세상에 나가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사소한 일에도 웃음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로 유쾌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부정적인 감정이 내뿜는 기분 속에 숨어들기만 하면, 결국 우울의 블랙홀 속으로 스스로를 잠식시키고 말 것이다.




K 삶의 이유를 묻는 것은 왜 좋지 않나요?

성혜나 저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건 '일상성'이라고 생각해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람도 쐬고, 밥도 먹고. 사람도 만나고. 그런 일상들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거든요. 우리는 어떤 거대한 대의명분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일상의 기쁨을 모르면서 '나는 왜 살지?' 라는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 점점 답을 찾을 수 없게 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어요. 그런 질문에 갇히다 보면 결국 일상이 무너지게 되고, 살아갈 이유는 더욱 없어지게 되죠. 그래서 그런 태도를 경계해야 해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저조차도, 일상의 기쁨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때가 많아요.

K 혜나 씨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상이란 어떤 거죠?

성혜나 일상에 규칙성이 있고 그 일상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일상이라고 생각해요. 학교에 지각하지 않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내가 계획하는 것들을 다 해내고. 일상이라는 건 나를 돌봐 주는 거에요.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소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혜나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바로 '일상성'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하루하루를 돌보지 않으면서 더 거대한 목표들을 세우고, 그 목표들이 좌절될 때마다 스스로의 능력을 탓하고는 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정신적 존재이기 이전에, '몸'의 존재다. 많은 현대인들은 몸으로서 살아가는 일상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더 위대한 가치들을 실현해 내려고 한다. 하지만 건강한 일상이 없다면, 지속적인 삶의 성취를 이루어낼 수 없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끼니에 맞춰 식사를 하고, 자신이 목표한 일과들을 착실하게 해내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정성을 기울이고, 소소한 일들에 감사함을 느끼고, 하루의 일들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제시간에 잠에 드는 삶. 혜나는 이러한 일상들이 우리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꾸준한 원동력을 제공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 사람만이 더 원대한 꿈들을 이뤄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K 삶에서의 원칙 같은 게 있나요?

성혜나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정성을 다하자. '최선'이라는 건 너무 주관적인 것 같아요. 최선 이전에, 정성을 다하자.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정성을 남이 알아봐 주면 더 좋은 거고요.


-


Background Image : (C) 2020. PIPE K

매거진의 이전글 5. 콩나물빵과의 인터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