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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파이프 PIPE K Oct 24. 2023

8. 변상호와의 인터뷰

감사하며 사는 삶, 그리고 '공존'의 질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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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는 30대가 되면 많은 것들을 이루고 난 후일 줄 알았어요.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고, 또 앞으로 안정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고. 저는 지금도 제가 어른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까지도 도전해야 할 일들이 많고,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물론 20대보다는 많은 점에서 여유가 생겼지만, 미래를 불안해 하는 것은 똑같아요. 20대였을 때 30대가 어른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40대가 되어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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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로 시작되는 심보선의 시 '삼십대'의 화자는, 청춘이 지나가 버렸다는 허무함을 느끼면서 자신이 '다 자랐다'라는 의미심장한 고백을 한다.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그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일상 속으로 불쑥불쑥 끼어드는 권태와 무기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라고, 무뎌진 마음에 대한 슬픈 정서를 드러내기도 한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라는 문장과 함께 마무리되는 화자의 담담한 독백은, 삶이 정체되기 시작하는 인생의 여러 지점들에 대한 복잡한 단상을 남긴다. 여섯 번째 인터뷰 대상자 '변상호'는 대학병원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커리어를 중단하고 미국으로의 이직 준비를 하고 있는 30대의 간호사이다. 최근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의료 기관에 채용이 되어 출국 준비를 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삶에 정체를 느끼기 시작한 순간 권태의 감정이 주는 무기력에 빠져들지 않고 해외 이직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과감하게 단행했다. 관성적으로 살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그와의 인터뷰는, 잠시 정체되어 있는 나의 삶을 점검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K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변상호 의료계열 쪽에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의대는 성적이 안 됐어요. 하지만 간호사는 취업률도 좋은 편이고, 다른 직업 분야보다 의료계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장학금 같은 현실적인 조건들도 맞아 떨어졌고요.

K 의료계열에서 일한다는 것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죠?

변상호 몸이 아픈 분들을 돕는다는 게 무엇보다 커요. 사람을 돕는 길은 정말 많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의료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도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더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학 다닐 때 후회되는 일이 갑자기 생각나는데요, 제가 간호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아침에 늦잠을 자서 지각할 뻔한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그때 지각하지 않으려고 캠퍼스를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었는데, 다리가 불편한 한 학우 분이 난간을 붙잡고 힘들게 계단을 내려가고 계시더라고요. 저는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못 본 체 지나가려고 했지만 그 분이 저에게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그 부탁을 거절했어요. '죄송한데, 수업에 늦어서요.' 같은 핑계를 댔던 것 같아요. 그날 저는 결국 수업에 지각을 하지 않았지만,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후회되는 일이네요. 사람을 돕겠다고 공부하는 사람이 출석 점수가 조금 깎이는 게 두려워서 몸이 불편한 사람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K 의료인으로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변상호 가장 힘든 때는, 역시 환자분들의 아픔을 봐야 할 때? 그리고 일하는 입장에서는, 업무량이 많을 때? 대학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고 정말 눈코뜰 새 없이 바쁘거든요.

K 그렇다면 가장 좋은 점은 뭘까요?

변상호 가장 좋은 점은, 제가 가진 힘으로 아픈 분들을 전문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점이고요,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작게나마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세상에 기여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한 명의 간호사는 다른 이들처럼 평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하나의 미약한 주체일 뿐이지만, 개중에서도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공헌하는 주체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상호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도 뜨거운 방식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존재다. 간호사인 그가 24시간의 정신 없는 교대 근무 속에서 매일같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이란, 한마디로 '아픈 사람'들을 돕는 일이다. 물론 그가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수행하는 모든 직업적 활동에는 적법한 보수가 주어지지만, 경제적 보상이 노동하는 현대인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요건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의 직업적 사명에는 분명히 특별한 데가 있다. 10년도 더 지난 작은 헤프닝에 대해 아직까지도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그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동에서 발견하는 인생의 가치들은, 세상이 여전히 따뜻한 곳이라는 휴머니즘적인 가정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보란 듯이 증명한다.




K 지금의 시점에서 돌아보는 20대의 삶은 어땠나요?

변상호 후회와 깨달음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시행착오도 많았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어서 큰 미련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의 삶에 원동력을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20대 초에는 수능에 여러 번 미끄러지면서 그게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은둔 생활을 했었는데, 지금 지나고 보면 소중했던 20대 초반의 시간들을 너무 무의미하게 날려 버린 것 같아서 후회가 돼요. 하지만 한 번 그렇게 해 봤으니까 미련이 남지는 않네요. 당시에는 내가 밑바닥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더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제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K 그렇다면 반대로 20대 때의 가장 좋았던 기억들은 어떤 건가요?

변상호 처음으로 제 스스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수능을 세 번 보고도 대학을 가지 못해서 군입대를 했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왔는데, 그 때부터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은 수석으로 졸업했거든요. 서울아산병원이라는 큰 병원에 취업도 했고요. 그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처음으로 행복해 하시는 결과를 만들어 냈던 것도 기뻤습니다. 그리고, 삼수를 하면서 지독한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다가 입대를 했는데, 군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많이 건강해졌어요.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다 보니까 제가 더 이상 꽁꽁 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하게 됐고요.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과 일정한 시간적 간극이 있는 과거를 돌아볼 때, 그 과거가 아무리 힘들었던 기억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그 시간들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인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재의 일들을 인지하고 처리하는 과정에는 이성적 사고만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처해 있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감정의 반응을 보이게 되고, 그 감정들은 실재를 인식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며 자연히 눈앞에 닥친 모든 사건들이 실제보다 더 큰 일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인식'의 과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결국 지난 기억들로부터 극단적인 감정의 상태를 벗어나 그 경험들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주었던 깨달음을 각자의 삶에 남기게 된다. 상호가 회상했던 20대 초반의 시절들은 그러므로, 스무 살의 어린 그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당시의 경험들을 자신을 성장하게 한 양분으로서, 그리고 자연스러운 과거의 한 페이지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의 현재가 '밑바닥'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는 혼자만의 공간에 꽁꽁 숨어 있지 말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서 삶을 재개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K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셨는데요, 30대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변상호 20대 때는 30대가 되면 많은 것들을 이루고 난 후일 줄 알았어요.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고, 또 앞으로 안정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고. 저는 지금도 제가 어른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까지도 도전해야 할 일들이 많고,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물론 20대보다는 많은 점에서 여유가 생겼지만, 미래를 불안해 하는 것은 똑같아요. 20대였을 때 30대가 어른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40대가 되어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어요. 저는 더 나아지고 싶고 그걸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미래가 저의 예상과 많이 다르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어요.

K 또 달라진 것들이 있을까요?

변상호 삶을 대하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한 것 같아요. 마음의 여유가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물론 불안함은 느끼지만, 20대의 불안감이 막연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제 분야에서 경력도 있고 현실적으로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때만큼 막연하지는 않아요. 또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커졌어요. 제가 지금까지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건,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20대 때는 타인에게 감사하면서 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다시 심보선의 '삼십대'를 떠올려 보자.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혹자는 '나이'라는 숫자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며,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는 요구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관습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의 정신적인 성숙과 나이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어떤 지점들에서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될 때가 있다. 이는 우리가 절대적인 숫자로 표현되는 시간의 관점에서 '나이'를 먹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인 타인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여러 변화의 지표들을 체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의 존재들이 하나둘 무언가를 성취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종종 자신이 충분한 성장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럴 때면 '삼십대'의 화자처럼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지도 모른다. 상호가 제시하는 생각들도 화자가 느꼈던 감정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는 조금 더 긍정적인 힘으로 그 시간들을 견뎌 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계획들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주는 조급함을 이겨 내고 있으며, 타인의 존재를 건강하게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다음 단계를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K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는 왜 감사하며 살아야 할까요?

변상호 혹시 신을 믿나요?

K 아뇨, 신을 믿지는 않습니다.

변상호 몇 년 전에, 제가 조금 아팠어요. 그때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많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서,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제가 참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요. 원래 무언가가 잘 되면 그게 다 제 덕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한 번 아프고 나니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바깥으로도 시선을 돌리게 되고. 사실 제 병이 더 심각한 종류의 병이었을 수도 있어서 두려웠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어요. 저는 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의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 만큼,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감사하며 사는 삶'에 대해 한동안 회의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들을 당연한 운명의 결과론이라고 생각했고, 운이라는 것도 각자의 팔자라는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때의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심리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말로 타인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탓이 컸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러한 능력주의의 오만을 꼬집으며 공동선(Common Good)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들이 이미 불공정하게 정해져 있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이 온전히 자신의 소유라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인생에서 누리는 거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타인들이 이루어내는 '공동선'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의 기회를 타인에게 베풀며 사는 데에 쓰겠다는 상호의 다짐은, 인류 전체의 공동선을 지켜내려는 '감사'의 미덕과 맞닿아 있다. 자신의 성취가 전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남을 돕는 데에 남은 생을 쏟겠다는 그의 태도는 사회적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질긴 '공존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K 어떤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나요?

변상호 아름다움이라... 저는 평화롭다고 느낄 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자연 속에 있을 때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걱정이 사라지고. 최근에 광화문을 갔었는데, 그때도 마음이 편안했어요. 집 앞에 석촌호수가 있는데, 거기를 강아지랑 같이 산책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 사소한 순간이 너무 평화로웠거든요.

K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왜 좋나요?

변상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돈을 안 들여도 된다는 게 큰 것 같아요. 우리는 다 돈에 묶여서 살잖아요. 일하는 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고, 살아가는 모든 곳에 돈이 필요하고. 그런데 저의 그런 사소한 순간들은, 돈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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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Image : (C) 2022. PIPE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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