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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Jul 01. 2024

위기(전환1,2)

 위기     


꽃길만 걸으라는 말은 덕담이 아니라 저주다. 꽃길이어서가 아니라 꽃길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꽃길만을 걸으면서 배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허구도 마찬가지. 갈등과 충돌 없이 사랑과 인류애로 충만한 의학 드라마가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에 불과한 건 그 때문이다. 천국에는 이야기가 없는 법. 시청률은 별개의 문제다. 


몇 년 전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일 년만에 초고를 완성하고 여기저기 출판사에 들이밀었다가 퇴짜를 맞곤 했는데 초고를 검토해 준 분이 한국소설의 주요한 구매층이 이삼십 대 여자이기 때문에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달리 말하면, 내 소설 속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의미). 그 후로 다시 일 년 반 동안 퇴고를 하면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떠올렸다. 만약 딱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코 제인 에어다. 


고아로 외숙모에게 온갖 구박을 받으며 자란 제인에어는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그녀는 학교에서도 위선적인 목사의 부당함에 맞서고 마침내 그곳을 나와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가 된다. 저택의 주인인 로체스터는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둘은 결국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저택에서 간간히 들리던 괴성의 주인공이 백작의 미친 부인임을 알게 된 후에 그녀는 결혼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하고 도망치듯 저택을 떠난다.

제인에어는 전혀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평범한 외모에 성격은 모나고 쉽게 분노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 모든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으니, 그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정한 원칙을 지키는 불굴의 용기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저택으로 돌아온 그녀는 저택은 불에 타 사라지고 로체스터는 부인을 구하다가 화상을 입고 실명을 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독자 여러분이시여, 나는 그와 결혼을 했다. 

로체스터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도 있다. 존 리스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 첫 번째 부인이 로체스터에게 정서적으로 학대당했다는 관점에서 소설을 썼다. 어쨌거나 손필드 저택의 화재와 로체스터의 화상이라는 위기는 두 주인공의 사랑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실 속의 화상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전 남친이 고용한 청부업자에게 염산 테러를 당한 여자 환자는 열 번도 넘는 수술을 받았지만 원래 얼굴을 되찾진 못했다. 홧김에 친구와 함께 자기 집 현관문 앞에 불을 지른 소년은 부모님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중환자실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방화를 저지른 사실과 화재현장으로 구조하려고 들어갔다가 쓰러졌던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연녀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뒤 차에서 분신을 시도한 남자는 끝내 암매장 위치를 형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홧김에 불을 질러 돌이 갓 지난 아기와 부인에게 심각한 화상을 입힌 남자의 오른쪽 팔뚝에는 푸른 잉크로 새겨진 ‘忍(참을 인)’이 선명했다. 셋 중에서 가장 가벼운 화상을 입은 본인은 석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병원과 경찰서를 들락날락 했다.  

그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어쩌면 오랜만에 내원한 환자의 농담처럼 화상병원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으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막연하게 추측할 수 있는 건 이들 모두가 화상을 입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십 년 전 여름이었을 것이다. 계절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와 마주치게 된 장소가 집 근처의 냉면집이었기 때문이다.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면을 몇 번 무신경하게 건져 먹더니 젓가락을 내려 놓고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남자친구를 빤히 쳐다 보고 있다. 

“왜?” 남자가 먹는 걸 멈추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맛있어?” 여자가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난 그런데.”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이게 무슨 맛이야?”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남자의 표정이 등 뒤에서도 훤히 보이는 듯했다. 

화상병원에 취직해서 바뀐 게 많지만 그중 하나가 냉면을 먹는 습관이다. 병원 바로 맞은편에 유명한 함흥냉면집이 있어서 여름이 되면 꽤 자주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그러다가 함흥냉면에서 평양냉면으로 입맛이 바뀌게 되고 집 근처에 단골집이 생겼다. 스무 살의 나였더라도 차갑고 밍밍한 고깃국물에 툭툭 끊기는 메밀면을 말아준 이런 음식을 사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여자가 까다롭다기보다는 남자친구의 입맛이 좀 올드한 것이리라. 얼마 후에 주문한 냉면과 제육이 나왔다. 여름이어서이기도 하고 원래도 손님이 바글바글한 곳이어서 우리 가족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일어났다.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꺼냈다. 

“어? 계산 끝났어요. 저쪽 분이 하셨어요.”

직원이 안쪽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어 가리켰다. 빨간 두건을 쓰고 몸에 딱 붙는 형광 사이클복 차림의 남자가 의자에 일어나더니 절을 꾸벅하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과장님, 접니다.”

처음에는 살이 많이 빠져서 못 알아봤지만 턱에서 목으로 내려간 화상 흉터를 보고 나서야 누군지 기억이 났다. 


남쪽의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이십 대 초반에 무작정 상경했다. 섬이 너무 답답해서 서울로 탈출하긴 했지만 번듯한 직장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 자격증 없이 고졸의 학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편의점 알바나 서빙 같은 시급이 낮은 비정규직뿐. 여기저기 주점 알바를 전전하다가 그는 결국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자살을 결심했다. 반지하방에서 조개탄을 피워놓고 잠들었지만 다음 날 살아서 깨어났고, 며칠 후에 다시 더 많이 피우고 잠들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는 방법을 바꿔 부탄가스를 잔뜩 뿌린 상태에서 잠들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자살에 실패한 후에 갑자기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생각은 ‘살자’였다. 죽으려고 세 번이나 시도했는데도 살아났으면 그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어떤 계시였다. 바닥에 놓여있던 담뱃값에서 담배를 한 대 빼서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쾅! 

“요즘 어떻게 지내요?” 내가 물었다. 

그가 땀이 난 손바닥을 허벅지에 슥슥 문지르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생선 비늘같은 그물무늬의 피부이식 자국이 손등에 선명했다. 당시에 그는 화상 체표면적 70퍼센트 화상을 입었고 열 번이 넘는 수술을 받고 석 달 뒤에 퇴원했다.  

“여기서 일합니다.”

베스트 디텍티브’라는 상호 밑에 탐정사무소라는 설명이 작게 찍힌 명함이었다. 


아쉽게도 그가 어떻게 탐정사무소 직원이 됐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화상을 입은 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건물은 그의 자살 시도 때문에 불이 났고 화재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흉터재건수술로 입퇴원을 수차례 반복하는 동안 경찰서에서 여러 번 조사를 받았다. 퇴원 후에는 화상 환우회에서 환자들의 여러 가지 민원을 해결해 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중증화상이고 수차례 재건수술도 받았고 방화혐의로 경찰서도 들락날락했으니 거의 화상 환자로서는 베테랑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곳에서 전혀 몰랐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게도 화상은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더 이상 응급의학과 의사로 살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있었고 선배의 제안과 함께 ‘기회’도 생겼기 때문이다. 화상외과의가 되면서 의사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전문 분야가 없다는 아쉬움과 소모적인 당직에 대한 불안-는 어느 정도 해소됐다. 엄밀히 말하면 내 경우는 화상이 아닌 화상외과의라는 직업이 그런 거였지만.

인생은 야구 경기와 같아서 위기와 기회가 1인 2역을 맡은 배우처럼 옷만 바꿔입고 번갈아 가면서 등장한다. 둘은 전혀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비슷한 점도 있는데 끝나지 않을 거란 낙관 또는 불안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결국 모두 지나간다. 중요한 건 그 시간 동안 돌파건 도전이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악은 연속 쓰리 볼 후에 다음 공을 기다리는 느긋한 타자처럼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걸 꽃길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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