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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Apr 08. 2022

학교폭력 피해자와 전교 부회장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본격적인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대학교 입학 이후 내게는 아무런 관여가 없었다. 언제 자던, 무엇을 먹던 누구도 나의 선택에 참견하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다. 밤 11시 취침이 아닌 저녁 6시에 자고 일어나 조용한 새벽에는 공부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눈을 뜨니 밤 10시다. 몸이 개운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엄마가 눈을 비비며 방으로 들어선 것이다.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나를 방 밖으로 끌어냈다. 같이 티비를 보자는 것이다.


    잠도 깰 겸 순순히 엄마의 뒤를 졸졸 따라나섰다. 아까 남겨둔 요구르트를 마저 마시며 티비를 봤다. 마침 둘 다 자주 즐겨보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의 재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푸른 나무 재단의 설립자이자, 명예이사분의 인터뷰였다. 불 하나 켜지 않은 거실. 혼자 밝게 빛나는 화면을 줄곧 응시하던 엄마와 나는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서로를 바라봤다.

    엄마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학교폭력 피해자다.


    초등학교 6학년 봄부터 시작된 집단 따돌림과 성희롱, 사이버폭력은 겨울방학을 이 주 앞둔 겨울이 되어서야 부모님과 선생님께 전해졌다. 학교 폭력의 표면적 시초는 바로 내가 예절 체험 이후 나의 한복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주동자는 학급 반장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거대한 움직임이 감춰질 수 있었던 것은 침묵이었다. 가족에 대한 비하와 내 태도가 모두 글러먹었다는 가스 라이팅이 이어졌다. 육상을 시작한 중학교 입학 전까지 나는 굉장히 말랐고, 같은 연령대보다 낮은 목소리 톤을 가진 나를 그 사람들은 남자라고 부르며 변성기가 시작되었으니 여자화장실이 아닌 남자화장실을 사용하라며 여자 화장실 밖으로 밀어냈다.


    당시 '카카오톡'이 문자메시지를 밀어낼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한 단체 카카오톡 방에 초대되었다. 그 속에는 한 친구가 앞으로 나랑 다니지 않겠다며 주동자에게 충성하는 메시지를 남긴 채 나를 제외하고 모두 그 방을 의도적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친구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던 친구였다.


    사이버 폭력의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시기. 왕따에 대해 그동안 당당히 맞서던 나는 그 단체 톡방을 보고 나서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내가 새로운 학교 폭력 피해자로 그 친구의 바통을 받았다는, 그런 이기적인 사실 때문이 아니다.

    나는 유일하게 그 아이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했다. 장애인복지관, 보육원, 노인복지관에 일하면서 내게 항상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불의를 보면 참지 말라며, 특히 힘들어하는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마침 그 친구가 나와 같은 아파트 동에서 거주했고 등하교부터 점심 식사, 방과 후 간식을 먹을 때까지도 함께 했다. 전학을 가겠다는 그 친구는 그렇게 끝까지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사이에 유일하게 학교폭력을 방관하지 않았던 나에게 이제는 가해자로 나타난 것이었다.


    삶은 잔인했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내민 손이 외면당했다. 착하게 살면 고통스럽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의 삶의 토대가 격렬하게 요동쳤고, 이따금 입원을 해야 할 만큼 고열과 복통이 지속되었다. 이유 모를 통증에 엄마는 불안해했다. 그게 겨울까지 이어졌고, 엄마는 눈치를 챘다.


    그날도 하교 이후 침대 안에서 누워있었다. 커튼을 쳐주러 방 안으로 들어선 엄마는 내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냐며 물었다. 나는 그저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는 내 휴대폰을 들고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서였을까.


    진통제를 먹고선 겨우 잠든 나는 방 밖의 소란에 잠에서 깼다. 엄마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와 함께였다. 아이는 울고 있었고, 두 엄마는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약기운에 잠이 들고 깨기를 반복했고, 깰 때마다 그 대화의 대상들은 바뀌어있었다.


    밖이 어둑해져서야 그 대화는 끝이 났다. 방문을 살며시 여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었고, 엄마는 내일 함께 등교하자고 말했다.


    다음 날. 이제 졸업식만을 남겨둔 초등학교 6학년 반 답지 않은 고요함이 펼쳐졌다. 누군가가 뻘쭘하게 내게 말을 건다. 방관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나를 외면했던 준가해자들 두세 명이 나 보고선 "우리는 친구지?"라고 말한다. 어이가 없다. 나는 비웃었고, 그 친구들은 그게 동의의 표현인 줄만 알았던지 나보고 연신 "고맙다"라고 말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친구인 게 당연했다면 보통 이걸로 고맙다고는 하지 않아,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건 앞으로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었다.


    4교시까지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지 못했다. 수업 없이 영화만 본다는 사실에 신이 난 아이들과, 넋을 놓고 있던 아이들이 극명하게 구분되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의 대면이 끝난 후에야 나와 선생님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분명한 건 1년간의 시간 속에서 내가 잘못한 건 없었고,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어도 마지막 끈을 붙잡고 있을 수 있었다. 세상이 나에게 고통만을 주지 않을 거라 믿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빨리 학교폭력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렇지, 그건 원망스럽긴 했으나 나는 그게 빨리 해결될 줄 알았기에 선생님께 말할 시기를 점점 놓치고 있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선생님은 무슨 죄인가.


    주동자였던 사람과의 면담에서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이유를 파악했다. 반장인 자신보다 부반장인 내가 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게 짜증 났다고 했다. 항상 평균 1점 정도만 앞서 있는 내가 거슬렸다고 했다.


    고작 1점.




    그렇게 면담은 끝났다. 어색한 공기 속 시간이 흘렀고, 중학교 배정일이 다가왔다.

    그리고 학교폭력 가해자의 90퍼센트가 나와 같은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그 중학교는 남녀 분반이며, 주변 학교에 비하여 소규모였다. 그렇다면.


    입학식 당일. 나는 또다시 좌절했다. 학교폭력심의위원회를 열지 않았던 게 이런 결과를 낳았다.

    학교폭력 주동자와 같은 반에 배정받았던 것이다. 서류상 어디에서도 우리 둘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꾹 참아온 마음은 불안에 흔들렸고, 입학한 지 일주일을 버텼다. 청소시간, 주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다른 친구와 피식 웃으며 귓속말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때. 나는 교실을 박차고 뛰어나가 아무도 없는 화장실 한편에서 울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다. 또 세상이 나를 배신한다.


    다행인 건 나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께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 입학한 지 고작 일주일 만에 이 관계를 들은 선생님은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그러나 선생님의 존재는 위대했다. 그 해 단 한 번도 주동자와 접점이 없이 무사히 2학년이 되었고, 그 이후 주동자와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우연인지,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1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가 3학년이 될 때까지 나의 담임 선생님이 되어주셨다. 선생님의 존재가 점차 안락하게 느껴지자 나는 빠르게 상처를 회복했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의 권유와 그 당시 친했던 친구들의 응원으로 나는 전교 부회장이 되었다.


 



    그 후의 이야기도 있다. 내가 입학하고 졸업했던 외국어고등학교에 주동자도 지원했다. 더 이상 불의를 참는 방법을 기억조차 못하는 나는 큰 그림을 그렸다. 만약 주동자가 외고에 합격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모아둔 모든 데이터로 입학 부적합 판정을 받을 수 있게 언론에 제보라도 할 작정이었다. '이 외고가 학교폭력 가해자도 인성면접에서 합격시키는 곳'이라고 언론에 알려서 내가 외고 합격을 취소당하는 불상사가 있더라도 꼭 나는 해내야 했다.


    외고. 그곳은 사실 내게 안락함보다는 고통을 안겨준 학교였지만, 전학을 가지 않고 버텨야만 하는, 훌륭한 학고 나는 굳게 믿다. 주동자가 2차 지성/인성 면접에서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구에게서 들은 이후부터였다.


    그렇게 주동자와 피해자는 각자의 학교로 멀어졌다. 고등학교 수능 이후 하교 버스에서 내리고선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 친구의 집으로 놀러 가는 길중에서 주동자를 다시 만났다. 아무렇지 않게 내게 웃으며 말을 거는 주동자의 표정을 보며 나는 "가증스러워"라 중얼거렸다. 여전히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주동자는 (아무도 묻지 않은) 자신의 안부를 늘어놓았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당시 외고 교복을 입고 있던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주동자의 바쁜 눈동자를 나는 말없이 바라봤다. 세상은 네 욕심대로 순순히 흘러갈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말 한마디 없이 제대로 보여준 것만 같았다. 가 질투하던 나는 앞으로도 그때만큼이나 훌륭할 거라 다짐하며, 이번에는 내가 먼저 주동자의 곁을 웃으며 떠났다.


    모든 일은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 주장은 충실히 세상을 정직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진다. 나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따스했던 선생님, 그리고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고 튀어 나서는 친구들에게 감사할 정도로 단단히 둘러싸여 당시의 신념 그대로 굳세게 성장했다. 그곳에서 나는 앞으로 세상을 더 정직하고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다.


   세상에는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대가 없는 사랑을 나누어준 사람에 대한 보답과, 상처를 준 그들을 향한 대가가 필요하다. <세상은 정직한 우리를 배신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 그 잔인함에 웃으며 복수하겠노라 각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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