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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뇨뇨 Aug 29. 2023

하지 못한 이야기


나는 장례식을 싫어한다. 장례식을 좋아할 이가 누가 있겠느냐만은 삶을 어느 정도 채우고 떠난 노인의 장례식이 아닌,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젊디 젊은 청춘이 생을 마감해 치러지는 장례식을 다녀온 후로는 더 그렇다. 자식 잃은 부모의 눈물은 이 세상 그 어떤 눈물보다 가슴이 아프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 사고 현장에, 환자가 이송된 병원에, 장례가 치러진 빈소에 있었다. 끔찍한 사고 현장보다도, 처음 보는 죽은 이의 모습보다도 더 뇌리에 깊게 박혀 날 힘들게 했던 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나와 연관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자식 잃고 목놓아 우는 부모를 보면 정말인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울게 됐다. 정신이 나갈 것처럼 울고 짐승처럼 운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


기자로 일하면서, 특히 사회부 사건팀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지, 하면서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해 내 스스로 조금은 무뎌졌구나 이제 이전처럼 힘들어하진 않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절대 이건 익숙해질 수도 무뎌질 수도 없는 거였나 보다.


또 허망한 죽음을 목격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차로 사람을 치고 칼로 사람을 찔러 2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쳤다. 죽은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죽었다 그들은.


사고가 터지고 현장에 달려가 취재를 했다. 너무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었지만 내 일이기에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믿었다.


그때 한 중년의 남녀를 봤다.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오열했다. 여자는 믿을 수 없는 듯 정신을 놓았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겨우 달래며 부축해 끌고 나갔다. 아직도 나는 그 장면이 생생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극도로 고통받는 사람의 표정은 이런 거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차마 말을 더 걸 수도 그들을 따라갈 수도 없었다. 내 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보단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을 겪었을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인간으로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한다면 난 더 무언갈 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모든 게 희미해졌을 때쯤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속보가 나왔다. 아, 잔인한 세상아. 기사를 보는 순간 생때같은 자식이 다쳐서 뇌사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 부모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잊고 있던 자식 잃은 부모의 울음소리와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그 빈소의 공기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버렸다.


아 이 잔인한 세상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정말 어째서.. 오늘 같은 날이면 신을 원망하게 된다. 도대체 왜 이들에겐 저렇게 잔인한 운명이 주어진 건지. 대체 왜. 그리고 누군가의 평범하지만 행복했던 삶을 망쳐놓은 이들은 왜 그런 짓을 한 걸지. 왜 매번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 건지.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언지 되새기게 하며 해이해졌던 마음을 다시금 다잡게 한다. 누군가의 슬픔이 당연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도록 또 그 슬픔이 잦아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방식이 무엇이 됐든 더 이상 누군가의 허망한 죽음이, 그로 인한 슬픔이 생기지 않도록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


그게 내가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들의 슬픔을 지켜본 대가를 치르면서 슬픔에 공감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서현역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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