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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수유 May 20. 2023

우리라고 해도 되나요?

우리라고 해도 되나요?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다. 이곳에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 언니네 집에서 함께 산을 마주 볼 때, 언니가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쓱쓱 문지를 때, 그 잠시의 침묵에 세상의 틈이 열린 듯했다.

언니는 나보다 열 살 넘게 나이가 많다.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나도 또 언니, 언니, 하면서 챙기는 성격도 아니다. 언니가 살아온 방식이나 삶의 면면들이 묘하게 나의 삶과 닿는 게 있다. 언니는 네팔에서 살다가 왔다(언니의 개인사를 개인 블로그에 적는 게 괜찮을까). 언니는 젊었을 때 이주민 노동자를 위해 일해 왔다. 언니가 웃으면 까무잡잡한 얼굴에 주근깨가 번지며 어린아이가 된다. 나는 그런 언니가 좋았다. 언니는 나처럼 주말부부로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런 언니는 내가 이곳에 정착할 때 마음을 많이 내어주었다. 언니는 언니의 공간 안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런 언니의 경계가 나는 좀 어려웠다. 나도 이곳에서 어디까지 마음을 내어 놓고 어디까지 가닿아야 할까를 고민했기 때문에 언니의 보이지 않는 선에서 종종 서성댔다. 그런 언니와 긴 겨울을 보내고 몇 달 만에 다시 보았다. 언니가 손으로 씀벅씀벅 무친 무말랭이와 볶은 김치, 네모나게 반듯이 썰어 부친 두부부침, 입 안에 넣으면 단향이 퍼지는 멜론까지.

언니의 밥을 먹고 홍차를 우려 내린 짜이까지 마셨다. 언니는 우리 집보다 더 높은 곳에 살기 때문에 지리산의 산들이 눈앞에 선연히 보인다. 그 산을 마주하고 긴 겨울을 보내면서 지나왔던 마음의 언어들을 서로 내어놓았다. 잠시의 침묵. 산이 주는 푸름과 고요함이 넘어와 언니와 나 사이을 평온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자연 하나면 되는 거 같아요,

저도 그래요, 이거 하나로 괜찮아져요.

언니를 안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내가 아는 언니들 중에서 스스로가 서 있는 사람 같아요. 언니의 경계는 있지만, 누구보다도 그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사람이라서 좋았어요. 언니가 살아온 방식이라던가, 이방인의 이야기들, 타국에서의 삶, 아이를 키워내는 결 같은 게. 그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숨통이 트여요. 나는 그런 언니가 좋아요. 저는 겉으로는 허허, 하지만 사람을 사귀는 게 어려워요. 그래서 깊은 마음을 내기까지 좀 시간이 걸리는데요. 언니는 그냥 툭 내어 놓게 돼요. 그래서 고마워요.

이곳에서 많은 언니들을 보아요. 저보다 어린 사람도 나이 많은 사람도 모두 언니이지요. 그 언니들 틈에서 그들이 쌓아 올린 많은 이야기를 봅니다. 소설로 쓴다 해도 어느 누구 하나 거리낄 게 없을 만큼 애쓰며 살아온 삶들이에요. 우리의 삶은 왜 이리도 애써야 할까요?

언니 말처럼 선택에 흔들리고 분명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선택에 흔들림이 없고 분명해서 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원래 천성이 그러해서 자주 잡생각에 빠지기도 해요. 기질을 거스를 순 없고, 이렇게 뭔가 마음에 묵직이 남는 날이면 언니도 모를 이야기를 써보지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듣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놀라웠어요. 이 지역이 공동체가 가진 에너지이기도 하겠지요. 다들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는 걸까요? 저는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어떤 일일까 생각해요. 흙을 밟고 사는 삶,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사는 일상이 궁금했어요.

일 년 반을 살아내고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분주함은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래도 알지요. 살아 있는 것으로 감각이 채워진다는 것을요. 문득 일렁이는 풀냄새와 하늘의 온도 같은 것이. 어쩌면 이방인으로 표류하는 제가, 언니와의 만남으로 3초의 구원을 느꼈다면 과장된 걸까요? 문득 만난 산이 참 너르구나, 편하구나, 창문 밖으로 바라보는 그 풍경에 잠시 쉬다 가네요.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아 깨었어요. 남편은 휴가 중이고 아이들과의 다가올 주말이 조금 분주하겠지만, 저도 늘 그렇듯이 손으로 밥을 차려내고 문득 하늘을 보겠지요. 이곳에서의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이 금세 아득해지네요. 또 금세 일상에서 조급해질 테지만, 그래도 제 몸과 마음이 켜켜이 이곳에서 느꼈던 낯섦과 안식의 순간들을 기억하리라고. 이곳에 와서 비 오는 날이 좋아졌어요. 물안개가 산 이곳저곳에 흐르고 날고 굽어지고 사라지는 게 좋아서요. 희미하게 금세 사라지는 것이라 해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이른 새벽입니다. 그렇게 또 언니와 같은 또 다른 언니들을 만나며 저도 좀 저를 돌봐야겠어요. 문득 써야겠다는 생각에 떠오르는 말들을 적어 봅니다.

우리라도 해도 되나요?

언니는 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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