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흘러간다
"그렇다고 네가 밭을 매고 농사짓는 시골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야. 나 역시 더 큰 도시, 더 시끄러운 시장, 그 번잡 속에서 소리치며 살아가는 문명의 아이로 키우고 싶었지. 다만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네가 철들기 전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네 부모가 자랐던 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작가 이상이 말한 것처럼 시골 풍경은 어디를 봐도 초록빛 일색이다. 도시 사람들 눈에는 권태롭고 심심해 보여. 그 초록색마저 밤이 되면 검은색 어둠으로 변해. 이따금 별빛이 보여도 그것은 가로등과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휘황한 서울의 야경과는 견줄 수가 없는 거야.
하지만 시골의 밤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 자연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나 홀로 새까만 어둠 속을 걷는데 먼 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다듬이 소리도. 그것이 얼마나 안도와 위안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밤이 무엇인지를 몰라. 불야성(不夜成)이란 말처럼 밤을 없애야 우리는 그것을 도시라고 불러. 불타는 소돔의 성 도시를 잠시라도 빠져나와 어쩌다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오두막집이라도 발견하면 사람이 얼마나 그립고 소중한지 알게 돼. 사람이 도리어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아스팔트의 밤길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지.
나는 너에게 가난하지만 수백 년, 수천 년간 변함없이 살았던 너의 조상과 이웃들의 모습을 주석 없이 그대로 보고 듣기를 원했던 거지. 그래서 너의 손을 잡고 조금 불편하거나 참기 어려운 경우가 있어도 눈 딱 감고 그 여행길에 오르게 된 거란다."
딸에게 보내는 굿 나이트 키스 | 이어령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