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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윰글 Mar 29. 2024

학부모 상담을 하다 울어버렸습니다

"뿌리 깊고 든든한 나무"

오늘은 둘째 아이의 학부모 총회가 있는 날이다. 전체 학부모 모임 후에 담임교사와의 상담이 진행된다. 난 학교 수업을 끝내고 가야 해서 상담만 하기로 정했다. 부랴부랴 둘째의 학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30도 정도로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 교문을 지나니 운동장이 있었다.  그곳에는 10여 명의 여학생이 배구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공과 서로의 얼굴을 보느라 교문에 들어서는 사람 정도는 안중에 없었다.


'예쁜 아이들'

'내 아이가 저런 활동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건 엄마의 희망일 뿐인가. 내성적인 둘째는 만약 내가 '00아, 배구 동아리에 들어갈래?'라고 물으면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십 리나 도망갈지 모른다. 그나마 현재 별 투덜거림 없이 학교를 잘 다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오늘 하루만큼은 교사가 아닌 한 여중생의 엄마가 되어 본다. 중학교 본관 건물 3층에 위치한 아이의 교실을 찾았다. 그곳에는 교실 앞에서 본인의 상담 순서를 기다리는 엄마들이 있었다. 막상 담임선생님을 뵈려고 하니 가슴에 떨림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00 엄마입니다."

"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의 음성이 들렸다.  


'교사의 직업병'


학부모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들의 스타일(?)을 예측한다. 그분을 눈앞에 두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3월 첫 상담에서 그들이 만드는 느낌은 교사로서 해당되는 아이를 일 년 동안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는 데 영향을 꽤 미친다.


둘째의 담임선생님은 피아노를 전공하신 음악선생님이다. 연세는 30대 중후반이고, 자녀가 있으시다. 학교를 오기 전에 미리 상상해 보았던 이미지대로 아이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한겨울 극세사 이불처럼 따뜻했다.


'삼면이 창문(?)'


보통 학교의 교실은 두 방향에 창문이 있다. 대부분 한쪽은 복도 그리고 또 다른 쪽은 운동장을 향한다. 하지만, 둘째의 교실은 세 방향에 창문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용하던 교실과 구조가 같다. 이렇게 창문이 많으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에 학생들은 수업을 듣기가 불편하다. 바람과 빗소리가 커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묻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흥미가 생기지 않는 수업이라도 들어있는 날이면 이 현상이 더 심해서 수업 내용이 마치 자장가처럼 아련해진다. 하지만, 이런 교실의 장점도 있다. 그건 빛이 교실로 꽤 들어와서 채광이 좋다는 점이다. 중학교 2학년은 북한이 남침(?)도 피할 정도로 무서운 학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들의 가슴에 화는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이런 교실에서 대책 없이 들어오는 밝은 빛은 그들이 가진 이유 모를 마음의 무게를 덜어줄지 모른다.


"00 이는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나요?"

"요즘..."


상담의 첫마디를 꺼내니 본격적인 중압감이 몰려왔다. 둘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로 아이의 공개수업을 보러 갔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쉬는 시간에 아이의 교실을 들여다보니, 둘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재잘재잘 거리며 수다를 떨거나 엄마를 보고 손을 흔들며 반기는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랐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막상 내 눈앞에서 보이는 그 모습에 난 가슴이 덜컹했다.


그 후 2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성장기 아이라도 2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큰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부족하다.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반 아이들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이겨내고 있는 둘째. 그래도 내 눈에는 아이의 노력과 변화가 보인다. 이런 과정을 객관적으로 담임선생님께 전달드리려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이의 현재와 전담임 선생님 두 분간의 소통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지금이 3월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담임선생님은 둘째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꽤나 숙지하고 계셨다.


'준비는 속도를 높인다.'


상담 시간을 줄이고, 필요한 내용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학교를 방문하기 전에 선생님께 드릴 말씀을 미리 적어두었다.


"아이가 그 일로 인해서 학교에서는 웃음을 잃어버렸어요."

"아, 그랬군요. 어머님께서 너무 속상하셨겠어요.  



'선생님, 제발 이러지 마셔요.'


이 말이 목까지 올라오며 가슴과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러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1-2초 정도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고, 선생님은 애써 그 장면에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동안이지만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다행히 눈물은 금세 말랐다. 그렇지만 통제 없이 흘러버린 내 눈물을 애써 지우려 하지는 않았다. 이 순간 나는 오롯이 엄마였고, 내가 흘린 눈물에 엄마로서의 솔직한 감성을 담아보고 싶었다.


"학교에 행사가 있으면 학부모님들은 주차를 어디에 하나요?"


아이 교실 앞 복도에는 예약된 상담을 기다리는 학부모가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꽤 친숙해 보이는 분들도 있었다. 엄마의 마음은 세계 공용어가 아닐까. 나의 시답잖은 질문에도 묻지 않은 내용까지 섞어서 답을 주는 분도 계셨다. 그분의 어색한 미소에도 친숙함이 느껴졌다.


"선생님, 일 년 동안 00 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 어머니." 


이렇게 오늘의 상담은 마무리되었다.





이번 주는 우리 학교에 상담주간이 운영된다. 반 전체 인원수가 21명인데 그중 17분의 학부모님이 상담 신청을 하셨다. 담임교사가 반의 아이를 이해하는 데에 부모는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이 내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 년 동안 '내가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적 협조'


교사가 학부모에게 바라는 것이다. 아이의 바른 성장을 위해 교사와 학부모는 같은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이 둘은 자칫하면 대치 국면을 접하기도 한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3월 초에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했다. 학년초에 아이의 집을 찾아가 학부모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집안 형편, 사는 방, 가족의 분위기 등 집에서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학부모를 통해 파악한다. 그 당시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나는 3월 선생님의 방문이 스산히도 싫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일까. 어느 순간 이 가정방문은 학교에서 사라졌다. 그러니, 요즘은 짧게는 5분 길게는 20여 분의 학부모 상담으로 예전의 가정방문과 같은 효과를 얻어야 한다.


'학업, 교우관계, 건강'


학부모 상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대화의 주제다. 학년이 오를수록 성적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이 커진다. 그런데 요즘은 이 주제 말고도 '부부 상담'에다 신세한탄(?)도 보인다. 그럴 때는 교직이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 인가 싶은 생각을 한다. 그래도 아이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또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이런 끄적임이 그해 아이가 보여줄 원인 모를 행동과 말을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눈물의 효과'


아이 앞에서 난 늘 미안한 엄마다. 내 마음만큼 움직여주지 않는 아이 앞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밤잠을 설치며 아이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마음으로 쓰고 찢은 소설은 또 몇 권인지 모르겠다. 엄마로서 24년을 살아가고 있는 난 학부모가 털어놓는 육아 인생에 공감한다. 나 또한 오늘 둘째의 담임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보였지만, 부끄럽다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엄마로서 의연해지자.'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성장을 위한 흔들림을 겪는다. 그러니 그 힘겨워하는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뿌리 깊고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고 싶다. 아이는 어떤 것을 하든 엄마를 생각하고 살핀다. 그러면서 본인이 하는 말과 행동에 내가 주는 인정과 공감을 바란다.


'난 너희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믿고 사랑한다.'


오늘 아이의 학교 교문을 나서며 SNS 프로필 문구를 수정했다. 그러면서 엄마로서의 나 스스로를 다시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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