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까다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늘 둥글 둥글 누구에게나 잘 맞추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의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 친구를 보면 더 헷갈릴 수 있다. 어쩜 그리 다양한 사람들을 골고루 잘 사귈까. 그래서 친구의 친구가 또 친구가 되는 그런 일은 극히 살면서 드물었다.
마흔을 넘고 보니 관계에서도 취향이 생긴다. 나와 마음이 맞아 오래 사귀는 사람이 있지만 늘 들어주어야만 하는 입장이 된다거나 필요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사람은 알아서 정리가 된다. 친구가 한 두 명 이어도 마음이 흡족한 대로 괜찮다. 예전에는 이 친구 저 친구 나름의 취향을 모두 맞추며 만남을 이어갔다. 내가 때로는 운전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으며 길거리의 복잡함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결코 나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쿨한 이유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아마 그런 핑계가 나의 무의식을 다독이며 평화협정이나 하자며 악수의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으며(사실도 그랬다) 사람들을 퍽 의식하며 살았다. 상대가 싫어할 일은 나 또한 꺼리게 되다가도 금세 다른 개성의 친구를 만나면 카멜레온처럼 바뀌었다. A를 만났을 때 길거리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다가도 저녁에 B를 만나면 노점상 거리에서 오뎅을 집어 먹는 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배려 같지 않은 배려의 모습을 나는 사랑했는가?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한동안 나라는 사람에 대해 방황했던 적이 있다.
십 대만이 사춘기를 겪는 건 아니다. 각 나이대마다 나를 찾는 여정의 심한 앓이가 지속된다. 이십 대에는 진로와 직업에 대해 방황하고 삼십 대에는 결혼과 육아로 방황한다. 흔들림이 없다는 사십 대에는 안 흔들려야 하는데 흔들려서 방황한다. 안정된 게 하나도 없어 보이고 가진 건 그리 많지 않은 나이다. 오십 대에는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다시 시작하고픈 방황의 때라고 한다. 그 이상은 살아본 적은 없으나 육십 대, 몸이 마음과 같지 않아 방황하고, 칠십 대에는 어느 정도 이루어 온 삶을 보며 고약한 노인이 될지 지혜의 노인이 될지를 가늠하게 된단다. 팔십 대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방황한다고 하고, 구십 대에는 망가져가는 몸을 느끼며 친구가 하나둘 없어져 가는 걸 지켜보게 된다. 백 세 때에는 ‘다 이루었다’ 말할 만큼 욕심도 없어진다나. 정말 재치 있으면서 웃기는 말이지만 또 공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각자의 나이에 따른 고민과 방황이 늘 있기 마련이라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다.
특히 나라는 사람에 대한 방황은 미래와도 연관된다. 좋은(성장하고 나아지려는 마음) 방황으로의 나를 찾는 일은 조금씩 내 주변의 관계를 오래갈 수 있는 신뢰의 만남으로 만드는 건데. 함께 할 수 없는 가지를 쳐내듯 관계에서도 안목이 꼭 필요한 이유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의 나를 쳐내는 일, 그건 어쩌면 용기와도 같다.
딱히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유지하고픈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를 지우며 상대를 만나는 일 따위는 이제 없을 테고 나의 존재를 톡톡히 알리며 남과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것. 이제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으로 각각의 코드가 다른 사람이라 해도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갈 수 있다.
맞다. 온전한 내가 된 나는 비로소 타인을 만나 행복이라는 걸 이어갈 힘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