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경 Jan 06. 2024

행복 기준

고까짓 것 껌 따위가

고까짓 것 껌 따위가 이렇게 감사하다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껌이라니. 그래도 해줄 것이 생겼다는 사실에 행여라도 부정이 탈까 나는 겸손한 자세로 몸을 낮춘다. 이 껌은 절대 고까짓 것이 아닌 아주 중요한 열흘 만의 첫 목 넘김이니까.


잠깐 사이 의사 선생님이 다녀가셨나 보다. 열흘째 굶으며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있는 아들은 극도로 예민하다. 아무것도 아닌데 입원까지 시켜 과잉보호를 한다며 심기불편함을 온 얼굴로 표현하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처치를 하고 통증이 가시자 아들은 체한 걸 가지고 유난을 떤다며 질색을 했다. 하지만 입영 날짜를 얼마 안 두고 염증 수치가 비정상적이라 확인이 필요했다. 거기다 의사 선생님이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지금은 정확하지 않아 말씀드릴 수 없고 입원해서 검사를 했으면 좋겠다니 어떤 엄마가 그냥 퇴원을 시키겠나. 화가 난 아들 눈치를 보느라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면서도 속에서는 부글부글 용광로가 끓었다. 다 못 먹은 탓이려니. 사람이 씹고 뜯고 마시는 즐거움은 배가 고파서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가장 기본적인 행복의 출발점은 바로 잘 먹고 잘 싸는 것임을 실감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병실을 찾은 선생님께 껌의 단물만 씹고 뱉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니 맛의 향유는 절대 배고픔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링거를 맞고 있어 아들은 절대 배가 고플 리가 없다. 그럼에도 열흘간 물조차 마시지 못하자 그 사소한 껌 하나로 엔도르핀이 돌았다. 누가 보면 대단한 주문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20살이나 된 놈이 딸기 맛, 청포도 맛 등을 나열하면서 말했다.


" 엄마, 다 사와. 맛별로 전부 다~ "


그래, 껌이 어디야. 덩달아 흥분해서 나는 잽싸게 지갑을 챙겨 들고 나섰다. 아들이 굶는 동안 나도 편하게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밥 먹고 오라는 아들 말에 식당에라도 가면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서 미안했고 목으로 넘어가면 명치가 꽉 막혔다. 저절로 극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던 중이라 껌이라도 뭘 입에 넣는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승강기를 기다리며 생각이 꼬리를 무는 중에 다른 병실에서 나오는 의사 선생님이 보인다. 그런데 나를 보자 방향을 내쪽으로 튼다. 분명히 나를 보고 오시는 중이다. 불안하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오시는 걸 보면서 심호흡 한 번 한다. 그간 검사 결과가 나왔구나. 아들에게 말하지 못했다는 건 분명 특별하다는 뜻이다. 일어나는 일과 운명이 정하는 것만 사랑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한 말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자. 짧은 시간 별별 소설을 다 쓴다. 오랜 검사 결과 크론병과 육아종이 발견이 되었단다. 12월 군대를 간다는 나의 말에 의사 선생님은 단호하게 못 간다, 보내면 안 된다 하시며 재검을 신청하라고 하셨다. 면제를 받아야 한다니 이 병들에 대해 잘은 모르겠으나 상태는 알겠다. 설명을 듣고 병원 문을 나서며 폭풍검색을 시작했다. 크론병은 입에서부터 항문에 이르기까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염증이 반복되는데 심하면 천공까지 생기기도 하고 대장과 소장뿐 아니라 항문까지 잘라내기도 하는 병이다. 또 아들의 육아종 조직검사 결과는 어디고 염증이 생겨 뭉치면 100% 암으로 발전을 하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


나는 최선을 다해 껌을 산다.

아니, 최대한 많은 맛의 껌을 사고 싶었다. 마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듯이 비장하게 껌이 있는 진열대마다 찾아 돌아다녔다. 하나라도 더 사려다 보니 양손에 껌보따리가 한가득이다. 왜 이런 병에 걸린 걸까. 내가 모유를 못 먹여서 그런 건 아닐까. 나는 뭘 잘못했을까 한없는 자책이 이어지는 내내 아들은 껌 파티가 열렸다. 이불 위에 껌을 잔뜩 부려놓고 이건 무슨 맛인지 저건 무슨 맛인지 씹고 뱉고를 반복한다. 고작 껌단물에 이렇게 행복하다니. 삶은 항상 조정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아들에겐 바로 지금이 그때인 걸까.



아들은 난치병 환자가 되어 퇴원을 했고 재검을 해 면제를 받았다. 매일 아침마다 면역조절제를 먹고 8년째 두 달에 한 번, 두 시간씩 주사를 맞는다.

나는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종종 처음 그날을 생각한다. 울며 껌을 사러 돌아다니던 그날 그 시간에 가 닿으면 모든 것이 사소해진다. 삶은 어차피 변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장 사소한 것들에 감사해하지 않으면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다. 오늘도 아들은 잘 먹고 잘 쌌다. 감사하고 행복하다.


한참 몸이 안 좋을 때 아들은 허리가 24인 여자 바지가 맞을 정도로 말랐었다. 매일 먹는 약과 두 달에 한 번씩 맞는 주사가 효과가 좋아 다행이다. 8년째 지금 아들은 아주 잘 먹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OFF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