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말씀 묵상
민수기 2:1~34[우리말 성경]
17 그다음은 회막과 레위 사람의 진이 부대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이동한다. 각 부대는 진을 칠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부대의 깃발을 따라 이동한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회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진을 치라고 하신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왜 중심에 회막을 두었을까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게 간혹 신이 존재하는지 물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입니다. "저도 모릅니다."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신이 존재하는지 단언하며 그것을 증명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드릴 수 있는 말은, 무신론도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전제로 한 신에 관한 이야기들은 현실에 몰입한 분들에게 김 빠지는 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상호 간의 믿음(신뢰)이 필요한 순간이 생각해 보면 의외로 많다는 것이지요.
깊은 믿음으로 이어지기까지, 사람의 중심에는 '생각'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이성적인 능력입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가에 따라 삶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입니다. 이 문장에서 시작된 그의 철학적인 사유가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사유(생각)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전에는 신화와 전통이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고 보증했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을 통해 판단의 주체로 설 권한을 인간이 가져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가톨릭 신부였습니다(종교 검열로 인해 비판의 대상을 직접적으로 들어낼 수 없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부패한 당시 가톨릭 교회의 구조를 철학적으로 해체하려 했습니다. 그의 눈에 교회는 성경의 본래 의도와 달리,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와 규율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때때로 인간에게 물음을 금지하고, 복종만을 요구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던 종교는 결국 '면죄부'라는 왜곡된 형식을 만들어냈기에, 그는 주체의 철학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무언가에 중심을 내어준다는 것에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과 우리를 이어 줄 수단이 되어 줄 제도적 '종교' 마저도 우리를 기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종교의 제도적 타락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생각을 속이는 허상과 거짓들을 걷어내면 다시 중심(본질)에 다시 도달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둔다는 것은 억압과 복종으로 구속되는 일이 아니라는 분명한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건, 삶의 올바른 질서와 방향을 되찾는 작업입니다. 제도적 종교의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중심에 계셨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을 이끄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갖는 것이 인생에 매우 유익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은 우리가 잘 모르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물음표 앞에, 삶을 어떻게 구분할지, 무엇이라 의미를 부여할지, 언제 다가서야 할지를 섣불리 판단 내리기도 어렵습니다. 그 물음에 답이란 게 정말 있나 싶습니다.
대인관계, 전공 분야, 자연, 인간의 내면, 같은 것들이 그러합니다. 물음에 답하는 여정이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심연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 깊이로 들어가는 문조차 찾지 못해 헤매기도 합니다. 때로는 세상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삶의 물음표가 끈질기게 내 앞을 가로막고 괴롭혀서, 분노하고 좌절의 감정에 짓눌려 그만 주저앉기도 합니다.
중세와는 달리, 사유의 주체로 선 우리는 더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삶은, 인생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물음표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놓게 합니다. 탄생과 죽음, 삶, 사랑, 이웃과 세상, 그러니까, 몇 가지 물음들이 해결되어서 숨 쉴 여유도 생기고 움직일 자유도 얻게 됩니다. 도서관의 책장이 정돈되어 있듯, 삶의 질문들이 비로소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완벽하게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물음표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평형을 얻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며 회막을 중심에 두고 이동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방향이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올바른 방향은 최단거리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으로 온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인에게 하나님을 중심에 두어도 풀어가야 할 문제들도 있고, 계속해서 마주하게 될 싸움도 있습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도보다 방향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